니카라과 태생의 최고 아웃풋 70년대 패션 아이콘 비앙카 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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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태어난 비앙카 재거는 중앙아메리카의 아주 작은 나라 니카라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녀는 나라에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총명한 학생이었고 그렇게 국가 장학금으로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며 잠시 인도를 여행하다가 미국에 정착하였습니다. 비앙카 재거의 성장 배경 비앙카 재거는 1945년 5월 2일 니카라과의 마나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 아버지는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 부모는 그녀가 10살 때 헤어졌고 그녀 엄마는 비앙카를 포함한 세 아이를 직접 양육하느라 갖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으레 후진국 마인드가 그런 것인지 이혼한 여성의 대우는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한 차별을 받았고 그녀 엄마는 생존하기 위해 버텨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은 비앙카의 정서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비앙카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프랑스에 대사로 나가있는 삼촌 덕분에 그녀는 국비로 유학을 갈 수 있었고 프랑스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믹재거와 사랑에 빠지다 매우 스마트하고 개념찬 젊은 여성이었지만 그녀는 외모 또한 그냥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특출했습니다. 그리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배우 일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녀는 일련의 작품에 출연하고 1970년에 유명한 밴드 롤링 스톤즈의 믹재거를 만나 불 같은 사랑을 하게 됩니다. 1971년 비앙카는 믹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그 해 5월 둘은 프랑스에서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1978년 5월 그들은 이혼했습니다. 비앙카는 믹 재거더러 성도착증이라고 했던가 연쇄 강간범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치를 떨어 했습니다. 실제 믹재거는 수많은 여성을 만나 씨를 뿌리고 다녔습니다. 글램 시크 룩 당대 최고 스타 믹재거의 연인이자 아내로 그녀는 상당히 유명해졌습니다. 특히 혼전 임신을 했기에 당시 디자이너 입생로랑은 그녀 만을 위해 특별한 드레스 제작을 해주게 됩니다. 그...

드랙퀸으로 추앙받은 70년대 슈퍼모델 그레이스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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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가수이자 슈퍼모델로 대중에게 매우 인상적인 이미지를 남긴 그레이스 존스 이야기입니다. 유니섹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레이스 존스의 이미지는 단연코 압도적으로 모호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외모였습니다. 그레이스 존스 성장 배경 1948년 5월 19일 자메이카의 세인트 캐서린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존스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가족과 함께 그녀 나이 12살 때 뉴욕 시라큐스로 이주하였습니다. 으레 엄숙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반항기가 심하듯 그녀는 13살 때 집을 나가 히피 공동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말이 히피지 그냥 집 나간 가출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당시 노는 아이들의 테크대로 고고 댄서, 요즘 말로는 클럽에서 춤을 추며 돈을 벌면서 끼를 발산하고 다녔습니다. 1970년대 초반 그레이스 존스는 나중에 뉴욕으로 가서 모델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모델 활동을 시작하지만 그녀의 외모가 대중적으로 어필하지 못하여 그녀는 프랑스로 가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녀의 지나치게 강직하게 남성적이고 까만 피부로 주목을 끌었고 입생 로랑이나 겐조, 헬무트 랑 등의 유명 디자이너의 러브콜을 받게 됩니다. 독특하고 강렬한 외모의 그녀는 현대판 조세핀 베이커로 불리며 인종과 성별에 대한 개념을 전복시켰고 또한, 외형적인 독특한 매력뿐마 아니라 가수로서도 남다른 기질을 발휘하였습니다. 1977년에는 앨범을 발매해 크게 히트하였고요. 특별히 장 폴 고티에와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녀 이름은 몰라도 외모만 보면 모두가 알 만큼 강렬한 외모의 소유자니까요. 그러나 그녀의 막강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델 생활, 보다 정확하게는 클럽에서 방탕하게 노는 생활에 환멸을 느꼈고 항상 배우가 되고 싶어하던 터에 배우 활동에 주력하게 됩니다. 매사 하고 싶은 대로 살던 그레이스 존스는 생방송 중 진행자 뺨도 때리는 등 싸가지가 없기로 유명했는데요. 자신 조차도 성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몰랐다...

내 눈에는 너무 못생긴 재클린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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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스트 레이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아마도 미국의 재클린 케네디 여사가 아닐까 합니다. 21세기에는 프랑스의 카를라 브루니가 나름 주목을 받은 것도 있지만요. 재키처럼 전 세계인의 관심과 주목을 끈 이도 없을 겁니다. 재클린 케네디의 화려한 이력 재키가 남달리 팔자가 드센 것도 있고, 워낙 패션 관계자들이나 대중들 사이에서 옷 잘 입는 패셔니스타로 이름을 날린 것도 있었고요. 그것보다 워낙 부유한 집안 태생에 사연 많은 스토리, 거기에 대학시절부터 퀸카에 공부 잘하는 명석한 여성으로 상류층에서 인기가 상당했다고 하는데요. 아바타를 닮은 그녀 그냥 얼굴만 보면 도저히 호감이 가긴 어려운 얼굴이긴 합니다. 그녀의 화려한 스펙 빼고, 퍼스트레이디였다는 팩트 빼고 얼굴만 보면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어딘가 인간보다는 인면어 느낌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럿도 아바타 여성이 아닌 남성과 닮아 보일 정도인데요. 재클린이 눈과 눈 사이가 상당히 멀고 코가 뭉툭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녀가 부유한 집안 태생도 아니고 공부도 못했다면 결코 미인 대접을 받기는 힘들었을테지만, 오로지 그녀 특유의 우아함과 기품 그리고 남다른 지성미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이겠죠. 게다가 몸매도 예쁘다고 볼 수 없었으니까요. 독특한 얼굴형 소유자 재클린 케네디처럼 영리하게 자기의 단점을 잘 감추고 다니는 셀럽도 드물 겁니다. 일단 톡 까놓고 재클린의 얼굴만 보자면, 얼굴형이 네모인데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한 스퀘어 형을 지녔습니다. 그런데다 이마는 좁고 턱은 짧고 광대도 비대칭으로 넓게 튀어나왔죠. 특히 눈과 눈 사이가 너무 먼 것이 신기해 보일 정도입니다.  빅헤드 재클린의 단점은, 어찌보면 장점이 없어 보일 정도로 단점 투상입니다. 일단 독특한 얼굴 이목구비와는 별도로, 얼굴이 몸에 비해서도 크고 타인과 비교해서도 큰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좁은 이마와 눌린 얼굴 등의 콤플렉스를 커버하기 위해 정수리 부분을 띄우는 스타일...

법대생에서 모델 그리고 배우가 된 세기의 미인 모니카 벨루치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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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카 벨루치는 놀라운 미모와 다재다능한 연기력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모델 출신 배우이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최고 미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 모니카 벨루치 모니카 벨루치는 1964년 이탈리아 움브리아라는 작은 마을에서 모니카 안나 마리아란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녀 엄마는 불임 판정을  받았음에도 기적적으로 임신에 성공했고 말도 안 되게 예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모니카 벨루치는 예술가 엄마와 농부 아버지 사이에서 소박한 유년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포도주 제조 및 채소와 딸기 등을 재배하는 일에 참여하며 살았고요. 소녀 모니카는 부모와 함께 도시로 나갔다가 화려함에 놀라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는데요. 그녀가 비로소 느낀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지내기에 그녀는 너무 예뻤고 카리스마도 넘쳤지만 그녀는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대에 들어갔습니다. 법대생이 모델이 되기까지 성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한 가운데 그녀는 페루자 대학의 법학부에 입학하였고 막대한 등록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피자 가게에서 웨이트리스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보다 나은 벌이가 보장된 모델 제안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작은 마을에서 모델을 시작했지만 한계를 느꼈고 더불어 변호사로 성공할 확률도 희박할 거라는 것을 직감하였고 그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있는 도전을 하기로 합니다. 2년 후 그녀는 학교를 중퇴하고 밀라노로 옮겼고 엘리트 모델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녀는 패션 무대에서 워킹을 하였고 완벽한 몸매에 완벽한 얼굴로 대중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각종 커머셜 광고에도 출연하면서 이후부터는 서술이 불필요한 20세말 가장 아름다운 미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모델 활동을 한 후 그녀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고 1996년 그녀는 헐리우드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배우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모...

끼 많은 딸로 태어나 최고 셀럽에 성공한 킴 카다시안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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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킴 카다시안은 1980년 10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의 베벌리 힐스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오제이 심슨의 변호사이자 사업가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끼와 야망 많은 무명 모델 출신이었습니다. 가장 끼 많은 딸로 태어난 킴 카다시안 그녀의 어머니는 영국, 네덜란드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 혈통이지만 아버지는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이라 그녀 피부는 다소 태닝한 것 같은 구릿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약간 중동 미인삘이 나는 거죠. 딸 셋 중 가장 아름다웠던 킴 카다시안은 엄마를 닮아 욕망도 남달랐나 봅니다. 그리고 부유층으로 성장한 만큼 주변에 널린 게 헐리우드 관계자 및 유명인들이었고요. 킴 카다시안의 부모는 1989년 이혼하였고 몇 년 후 그녀의 아버지는 2003년 식도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엄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운동 선수 중 한명인 케이틀린 제너와 재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이복 자매 켄달 제너와 카일리 제너가 생겼습니다. 패리스 힐튼의 가방 모찌 킴 카다시안은 어릴적부터 패리스 힐튼의 친구, 엄밀히 말하면 가방 모찌 같은 시녀나 다름없었는데요. 아시다시피 패리스 힐튼은 옷을 너무 못 입고, 킴은 옷 입는 것에 대해 너무 관심이 많다고 자평하는 터라 나름 패리스 힐튼의 스타일리스트를 자청하였습니다.  당시 시대 분위기가 돈 많은 플렉스 녀 패리스 힐튼의 개념없는 소비 패턴에 대중이 선망하던 트렌드가 있었죠. 패리스 힐튼의 리즈 시절이기도 했고요. 당시 패리스 힐튼은 킴 카다시안에게 엉덩이만 뚱뚱한 둔녀 라는 등 비하가 살벌했다죠? 그런 킴 카다시안이 참으로 공교롭게도, 한국 같으면 절대로 사회 생활 못 할 것 같은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면서 떡상하게 됩니다.  섹스 비디오로 떡상한 킴 카다시안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죠. 그리하여 제대로 어그로 끄는 데 성공한 킴은 가족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보여주는 킴 카다시안 패밀리 프로그램을 찍게 되었고 이 프로그램이 폭발적인...

패션 아이템 칼라(collar)의 종류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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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깃 칼라의 종류를 총망라했습니다. 네크라인과 비슷하면서도 구분이 되는데요. 의상에서 칼라가 차지하는 부분은 매우 크며, 뭐랄까 의상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보다 구체적으로는 의상 칼라에 따라서 옷의 개성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옷깃의 종류 러플과 피에로 칼라 러플 칼라는 목선에 주름이 잡힌 것으로 15세기 엘리자베스 여왕이 크게 유행시킨 아이템입니다. 초기에는 뻣뻣한 형태 유지가 힘들어 몇 번 착용하지 못한데다 손이 많이 가 비싼터라 왕족이나 귀족층에게만 선호되었고 훗날 일반인들도 착용하긴 했어고 크게 유행하진 못했습니다. 러플 칼라와 비슷한 피에로 칼라는 판토마임 등에 나오는 피에로 캐릭터의 전통 의상에서 착안한 칼라입니다. 그래서 광대, 즉 피에로 칼라라고 합니다. 러플이 주름이 세워진 반면 피에로 칼라는 여러 겹으로 수평으로 뻗어 넓고 평평하게 나풀거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드레이프와 롤 칼라 드레이프 칼라는 드레이프 네크라인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네크라인 중심으로 치렁치렁 혹은 너풀거리게 목선 주위에 부드러운 계단식으로 떨어지는 칼라입니다. 롤 칼라는 둥글게 말린 네크라인과는 사뭇 다르게 칼라 끝이 둥그렇게 접힌 스타일을 의미합니다. 드레이프 칼라와는 사뭇 다릅니다. 스탠드 칼라와 스탠드 어웨이 칼라 스탠드 칼라는 차이나 혹은 만다린 칼라처럼 목 둘레가 선 칼라를 의미합니다. 스탠드 어웨이 칼라는 떨어져 있다는 뜻으로 스탠드 칼라와 비슷하면서 목에서 떨어진 칼라를 의미합니다. 메디치 칼라와 비브 칼라 메디치 칼라는 목 둘레 뒷쪽에 풀을 먹인 천 등으로 마치 공작새처럼 세운 깃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유행하였고 주로 왕족 귀족층이 선호하던 칼라 스타일이죠. 화려한 드레스에 적합한 옷깃이었고요. 반면 비브 칼라는 턱 받이처럼 앞쪽에 길게 늘어뜨린 칼라를 의미합니다. 권위적인 느낌보다는 소녀적이고 유아적인 이미지가 강한데요. 그래서인지 프릴이 달리고 러플 등 아기자기한 이미지가 강합니다. 물...

큰 가슴이 콤플렉스였던 브라질 최고 아웃풋 슈퍼모델 지젤 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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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원 탑 슈퍼모델 지젤 번천의 이야기입니다. 1998년 알렉산더 맥퀸의 런웨이 쇼에 처음 캐스팅된 후 스타가 되었지만 그녀가 세상에 알려진 가장 큰 사건은 바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섹시한 여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지젤 번천 지젤 번천은 1980년 7월 20일 브라질 남부의 한 지역에서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으며 그녀를 포함해 다섯 자매와 함께 자랐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말랐다고 놀림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다가  1994년 14살의 그녀는 착한 말괄량이 소녀였지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큰 가슴으로 인해 고개를 못 들고 다닐 정도로 콤플렉스가 생겼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쇼핑몰을 거닐다가 엘리트 모델 에이전시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녀는 모델 선발 대회에 참여하여 브라질에서 2위 세계 무대에서 4위를 한 후 모델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뉴욕으로 이주한  그녀는 곧바로 브라질 패션지의 표지를 장식하였고 런웨이에서 걸음 경력을 쌓아가다가  18세 때 알렉산더 맥퀸의 무대 위에서 첫 워킹을 하면서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었다는 데요. 바로 첫 무대에 상의 탈의를 하고 걸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 입장에서는 경악할 노릇이었던 거죠 . 인상적이던 알렉산더 맥퀸 무대 그녀는 오열했고, 모델 일은 시작도 하기 전에 중단할 무렵 백스테이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의 가슴 주변으로 흰색 칠을 해서 그녀는 오열을 중단하고 무대를 걸었고 성공적인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2000년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녀는 빅토리아 시크릿을 대표하는, 자그마치 7년 동안 활동하였고 당대 최고 헐리우드 스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열여덟살의 지젤 번천은 스물네 살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사귀며 가장 오래 사귄 연인으로도 알려졌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