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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패션 모델계의 선구자 1970년대 빌리 블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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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호학을 전공하고 디트로이트 자동차 쇼에서 모델로 일한 빌리 블레어는 1970년대 성공한 모델이기도 하면서 당시 몇 안 되는 흑인 모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모델을 꿈꾸었지만 피부색때문에 모델은 꿈도 꿀 수 없었고 간호사가 되기로 했던 겁니다. 드물게 매혹적인 패션 모델 빌리 블레어 1946년 미국 아칸소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그녀의 아버지는 침례교 목사였습니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녀의 아버지는 아들임을 확신해 아이 이름을 윌리엄 주니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과는 다르게 딸이 태어나자 그녀의 이름은 빌리가 되었습니다. 몇 년 후 그녀는 자동차 산업이 한창일 때 미시간주 플린트로 이사하였고 곧고 아름답게 성장한 그녀는 자동차 쇼를 시작으로 패션 무대로 올라가며 꽃을 피웠습니다. 물론 그녀가 활동하던 시기는 패션 무대가 제대로 구색을 갖추지 못한 때였음에도 그녀는 출중하고 압도적이었습니다. 자동차쇼 모델에서 마네킨 모델 현대 모델계는 흑인 등 인종 차별이 무의미하지만 70년대만 해도 그녀의 탁월한 존재감과 피부색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이것이 정확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으나 1974년 스물두살이라고 했던 그녀의 프로필과는 다르게 그녀의 친구들은 스물여덟살이었다고 하는데요. 어찌되었는 그녀의 태어난 생년은 1951년생이라고 합니다. 빌리 블레어의 타고난 하드웨어와는 별개로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절이었기에 업계 사람들은 그녀의 마네킨 이미지에 앵글로색슨족의 피부색을 입혔습니다. 피부 세탁을 하면서 그녀의 민족성을 지웠던 거죠. 하지만 크게 광분할 필요까진 없어 보입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요.  참고로 쇼윈도우에 실물 이미지의 마네킨이 성행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화보 속에 갇힌 혹은 피부색을 바꾸어가며 포즈를 취했음에도 그녀의 완벽한 몸짓은 매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녀가 결정적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때는 1973년 베르사이유 궁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였습니다. 인종

최초의 아메리칸 원주민 출신의 70년대 슈퍼모델 캐시 다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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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네임 캐서린 헬렌 삭스네 캣시 다멘은 최초의 아메리칸 원주민 출신의 모델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1945년 9월 16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일인이었고 어머니는 치페와인이었습니다. 치페와는 미네소타 슈페리어 호수 지방에 사는 북미 최대의 원주민을 일컫습니다. 치페와 출신 슈퍼모델 캐시 다멘 미네소타에서 줄곧 성장한 그녀는 17살에 예술가인 삼촌 조지 모리슨과 함께 살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조지 모리슨 역시 미네소타 치페와 시티 태생으로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삼촌과 함께 살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재학중인 16살에 미혼모를 위한 집에 살며 출산을 한 그녀는 아이 이름을 베로니카 로즈 다멘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녀는 딸에게 크리켓이란 별칭을 부르며 11개월 동안 키웠는데요. 캣시가 학교에 간 사이 그녀의 엄마가 아이를 미네아폴리스 지역으로 입양을 보내 버리게 됩니다.  혼외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한 것이 당시 미국 사회에서도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비난 받는 일이었지만 캣시는 누구보다 당당했고 남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학창 시절에도 영어와 미술에 매우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아이를 입양 보내며 캣시는 이후로 자신의 딸을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녀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됩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딸에게 마지막 포옹이나 작별 키스조차 해주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상처가 있는 가운데 엄마와 함께 지내고 싶지 않았던 캐시는 삼촌이 있는 로드 아일랜드로 이사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녀의 삼촌은 그녀를 그림에 담았고 어느 날 뉴욕 타임즈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초상화 속 그녀를 발견하여 모델 세계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물론 고등학교 교육을 마칠 때까지 그녀의 에이전시는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최초의 북미 원주민 모델이 탄생하게 됩니다.  포드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가장 돈 잘버는 모델 반열에도 오르며 수많은 패션 잡지 표지를

70년대 톱모델 낸시 도나휴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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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낸시 도나휴는 1970년대를 풍미한 톱모델입니다. 1958년 2월 16일 그녀는 매사추세츠 주 로웰의 카톨릭 집안에 11명의 아이 중 한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잡지에서 가벼운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뉴욕에서 모델 활동을 하던 바텐터 남자 친구가 사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녀의 남자 친구 및 지인들이 본격적인 모델 제안을 하였고 그녀는 마드모아젤 잡지 모델에 응모한 후 본격적으로 모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낸시 도나휴의 모델 활동 그녀는 보그, 하퍼스 바자 등 수많은 잡지 표지를 장식하였고 뉴욕과 홍콩 등에서 런웨이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커버 걸과 알메이 화장품 모델을 오랫동안 하였습니다.  그렇게 젊은 시절에 너무 일찍 잘 나가고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코카인 중독으로 얼굴이 말도 못하게 수척해졌습니다. 그녀 모습을 본 그녀의 어머니는 코카인을 끊지 않으면 자신을 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여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약을 끊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만한 생활 모델 생활과 멀어지고 약을 끊고나서 낸시는 요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녀 엄마가 훌륭한 요리사였던 것도 있었고요. 그녀는 빵을 굽고 싶다는 생각으로 요리학교에 다녔고 1등으로 졸업하며 페이스트리 요리사 및 만능 요리사가 되었습니다.  요리도 어느 정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보니 기분 전환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번에는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낸시는 트라이애슬론 선수가 되었고 요가와 필라테스 강사로 활발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에 멈추지 않고 하버드 연구진과 함께 살 빼는 제품 연구를 3년 동안 하다가 특효약도 개발했다고 합니다.  터널 끝 행복 인생에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그녀는 터널의 끝에 빛이 있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녀의 우여곡절 중 가장 큰 부분에 속하는 것은 1990년대 중반 그녀가 소속되어 있던 엘리트 모델 에이전시의 자금 담당을 잘못 추천한 데 있었습니다. 그는 회사 내 별도의 캐피탈 회사를 운영하며 소위 사기 횡령

스티브 맥퀸의 미망인 슈퍼모델 바바라 민티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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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바라 민티는 70년대 꽤 잘 나가던 패션 모델 중 한명이었지만 그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당시 가장 인기있던 배우 스티브 맥퀸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스티브는 당대 최고 스타 앨리 맥그로우과 재혼해서 살다가 1978년에 헤어졌는데요. 바바라 민티를 유명하게 한 러브 스토리 결과적으로 스티브는 바바라와 오래 살지 못하고 암으로 단명하였고 바바라는 훗날 다른 남자와 재혼하였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바바라 민티와 앨리 맥그로우는 외모도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바바라 민티는 1953년 6월 11일생으로 2024년 기준으로 70세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오레곤주 코발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971년에 그 지역의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빼어난 외모의 바바라 민티는 당시 파워 에이전트인 아일린 포드와 계약을 맺으며 1970년대 광고는 물론 수많은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며 잘 나가는 슈퍼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맥퀸은 광고에서 바바라의 모습을 보았고 에이전트 사장을 졸라 그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 출연을 같이 한다는 빌미로 작업을 걸고 있었죠. 그렇게 하여 몇 달 동안 사귄 후 1980년 1월 16일 스티브 맥퀸과 바바라 민티는 결혼하였고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곁에 있었습니다. 스티브 맥퀸은 헐리우드의 악명 높은 배우로도 유명했습니다. 그가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바바라 민티와도 관계가 어땠을지 짐작이 갈 정도인데요. 그래도 바바라는 스티브 맥퀸의 좋은 기억만 가지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엑스 와이프 엘리 맥그로우에겐 악몽 같았을 겁니다. 스티브가 여자를 상습적으로 폭행한 것으로 유명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델이 되려 했던 이유 다시 모델 얘기로 돌아가, 바바라 민티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본인도 항상 모델이 되길 꿈꾸워 왔었다고 합니다. 또한, 여기에는 반전이 있는데요. 낙농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농장에서 자란 그녀는 어릴 적부터 많은 돈을 버는데 관심이 있었고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