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미남 남다른 여성 편력 그리고 훼밍웨이와의 같으면서 다른 점

 다면적인 매력을 지닌 세기의 미남 게리 쿠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게리 쿠퍼는 무성영화 시절에 데뷔하여 1950년대까지 대체불가 최고의 배우로 그야말로 세상을 평정한 배우입니다. 미국인은 물론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는데요.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것은 물론 잘생긴 외모로 인해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태생부터 남다른 게리 쿠퍼


게리 쿠퍼는 태생부터 남달랐습니다. 판사 아버지에 의사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두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요. 부모가 소유한 목장에서 말을 타고 낚시를 하면서 어린 시절을 만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 짓궂은 형제들을 영국의 명문 사립 학교로 유학을 보냅니다. 보다 교양있고 사람답게 거듭나라는 의도였겠죠?



100명 미만의 경건하고 엄숙하고 절제된 문법 학교에 3년 동안을 다녔지만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의 어머니는 아들들을 고향으로 소환합니다. 학교에서 반듯한 정장을 입고 교양이 몸에 밴 터라 마을 아이들은 이게 뭔 시추에이션이냐며 놀리기 일쑤였죠. 게리 쿠퍼는 다시 멜빵 바지를 입고 톰소여의 모험을 시작합니다. 


평생 다리를 절게 만든 사고


그리고 어느 날 차 사고가 나는 바람에 게리 쿠퍼는 엉덩이 쪽을 크게 다쳤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걷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는데 의사가 재활에 승마가 좋을 것 같다고 권해서 승마를 집중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어떻게 엉덩이가 다쳤는데 승마가 좋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갔는데요. 나중에 게리 쿠퍼도 이 시간들을 후회했답니다. 그는 사고 이후 평생 다리를 약간 절뚝 거리게 되었는데요. 심하지는 않지만 어색한 걸음 걸이는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승마로 재활 치료를 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멀쩡하게 걸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게리 쿠퍼가 다리를 저는 것은 그의 인생에 전혀 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누구라도 반할 잘생긴 얼굴에 190센티가 넘는 키에 남녀 모두에게 호감있는 매력의 소유자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너무 다 가진 재력과 능력 때문인지 막상 자신의 꿈은 제대로 챙기질 못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카우보이가 되려고 했습니다. 고향 땅에서 말만 타왔던터라 그에게 가장 자신있는 재능이었죠. 그렇지만 그의 고학력 부모는 그가 카우보이가 되더라도 고등학교는 졸업을 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게리 쿠퍼는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뭔가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말 안장이 아닌 교실 책상에 앉으니 끄적 끄적 그림 그리는 일이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만화가를 꿈 꾼 게리 쿠퍼


게리 쿠퍼는 아이오와주의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다가 예술을 공부하겠다며 시카고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술도 낙제를 받고 학교를 중퇴합니다.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와 지역 신문에 카툰을 연재하면서 삽화가를 꿈꾸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무렵 그의 아버지는 로스앤젤레스의 부동산을 상속받아 판사직을 그만두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게리에게도 합류하길 원했고요. 


게리 쿠퍼는 밖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 부모 집에서 따뜻하게 굶어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부모 집에 얹혀 살게 됩니다. 반 백수나 다름 없는 생활이었죠. 그러다 말을 잘 타는 스턴트맨이 필요하다는 얘기에 솔깃해서 그때부터 스턴트 맨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스턴트 맨에서 배우로 


걷는 것보다 말 타는 게 더 익숙했던 게리 쿠퍼는 스턴트맨 생활을 하면서 날라 다녔습니다. 하지만 스턴트맨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위험한 직업입니다. 게리 쿠퍼는 어릴 적 사고를 크게 당한 경험이 있기에 일순 겁이 났습니다. 이렇게 위험하고 무모한 일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배우를 하는 게 낫겠다 싶었고 그를 좋게 본 사람들이 작은 배역을 맡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게리 쿠퍼는 클라라 보우에게 당첨됩니다. 무성영화 시절에 가장 잘나가던 여배우 클라라 보우는 잘생긴 남자에 패티시가 있는 것인지 당대  꽃미남 계보의 시초이자 그녀의 약혼남이기도 했던 루돌프 발렌티노의 이른 죽음 때문인지 게리 쿠퍼를 본 순간 반해 버렸습니다. 게리 쿠퍼도 그녀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라라 보우가 그의 배우 입성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성 영화에서도 히트다 히트



무성 영화에서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한 게리 쿠퍼는 1929년 유성 영화 버지니아에 첫 출연하면서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역시 당대 최고 여배우 마릴린 디트리히와 영화 모로코를 찍으며 대형 배우로 안착합니다. 물론 마릴린 디트리히와도 교제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게리 쿠퍼의 여성 편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여성들을 홀리고 다녔습니다.


훼밍웨이와의 특별한 만남



게리 쿠퍼는 소설가 훼밍웨이와의 인연도 빼 놓을 수가 없을 겁니다. 그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를 영화화하면서 게리 쿠퍼가 주연을 맡게 되었는데요. 영화 개봉 후 훼밍웨이는 영화는 혐오 그 자체였지만 게리쿠퍼의 연기는 훌륭했다고 극찬했습니다.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이 영화에서 그는 강렬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연기로 전세계인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고 하죠.



이후 훼밍웨이는 후속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하였는데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훼밍웨이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그는 게리 쿠퍼를 떠올리면서 글을 썼다고 하는데요. 이 작품도 베스트 셀러가 되자 영화로 만들기로 하였는데 작가는 콕 집어서 게리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을 주인공으로 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훼밍웨이와 게리쿠퍼는 20년 동안 절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둘 다 키도 비슷한 장신에 부유한 출신의 엘리트에 속했으며 남다른 여성 편력으로 비슷한 점도 많았지만 정치색은 정반대였습니다. 게리쿠퍼는 집안부터 뿌리깊은 보수적인 공화당원이었고 훼밍웨이는 공산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극좌파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극과 극이 만난 것인데요. 둘 다 무교였지만 나중에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된 것도 특이합니다. 


게리 쿠퍼의 여성 편력


게리 쿠퍼는 1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부와 인기를 다 거머쥔 초특급 스타였는데요. 오죽했으면 그에게 대통령에 출마하라는 제안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시기에 당선된 루즈벨트 대통령은 살다 살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봤다며 아마 게리 쿠퍼가 선거에 나왔다면 자신은 승리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기많고 매력넘치는 게리 쿠퍼는 여자를 유혹하는 솜씨도 단 세마디면 충분했다고 합니다. 사실 말도 필요없었겠지만요. 그래서인지 오는 여자 마다 않고 찍는 영화 마다 파트너 여배우들과 스캔들이 났는데요. 그래서 미국인의 연인뿐만 아니라 여배우들의 연인이란 별칭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만을 비롯하여 그레이스 켈리, 캐롤 롬바드는 물론 멕시코, 프랑스 등 각국을 대표하는 최고 여배우들과 다 길고 짦은 연애를 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1933년 짧은 배우 생활 이후로 뉴욕 사교계 명사로 더 유명했던 베로니카 발프와 결혼하였는데요. 집안 좋고 매력 넘치는 그녀 사이에서 딸 마리아를 낳고 잘 사는 가 싶었지만 결혼 후에도 여성 편력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당시에는 남성의 바람끼는 적당히 눈 감아주는 분위기이긴 했지만요. 둘 사이에 별거까지 하게 되는 초특급 스캔들이 터진 적도 있습니다.


1948년에 영화 마천루를 함께 찍은 배우 페트리샤 닐과 사랑에 빠진 겁니다. 무려 스물 다섯 살의 나이차가 났음에도 페트리샤는 게리쿠퍼의 늪에 빠져 정신을 못 차렸는데요. 비밀스럽게 관계가 끝났나 싶었는데 스캔들이 터지면서 게리쿠퍼가 이를 인정하게 되자 아내 베로니카는 이혼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게리 쿠퍼는 이혼은 못하겠다고 해서 별거에 들어갔는데요. 페트리샤 닐은 게리쿠퍼가 낙태를 종용했다고 세상에 폭로까지 한데다 자살 시도까지 하여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그리고는 정신병동에 갇히고 그를 가지지 못할 바에야 영원히 은둔자로 살겠다고 하였고요.






정신을 차린 게리쿠퍼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게리쿠퍼의 이미지는 크게 손상되었고 그도 이 참에 크게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더는 젊고 매력적이지 않은 남자란 사실을 클라크 게이블과 치고 올라오는 로버트 테일러를 통해서 깨달은 것도 있고요. 그래서 연기에 더 전념하게 되었고 연기력으로는 그를 능가할 자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내와 화해하기 위해 로마 교황을 만나 세례도 받았고  1954년 부부는 다시 화해하고 같이 살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건강이 허락하질 않았습니다. 1930년대 중반에도 빈혈과 황달로 인해 요양을 간 적이 있던 그는 촬영 중 위궤양을 호소하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왔는데요. 1960년에는 전립선 암 수술을 받았으나 폐와 대장으로 전이되어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수술로도 불가할 정도의 상태가 되었지만 가족들은 이 사실을 게리쿠퍼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1961년 1월 중순경 게리 쿠퍼는 가족들과 아이다호의 선 밸리로 휴가를 갔습니다. 그리고 훼밍웨이와 함께 눈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이킹을 갔습니다. 1961년 2월 27일 로스앤젤레스 자택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신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4월에 게리 쿠퍼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게 되었지만 친구 제임스 스튜어트가 대신 수상하면서 울먹이면서 쿠퍼가 위중하다며 울먹이며 말하면서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한 달 후 5월 13일 그의 60번째 생일하고 6일이 지나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두고 한 시대의 종말이라고 할 정도로 애통해 했습니다. 


페트리샤 닐 이후로 여자는 안 만난 줄 알았는데 그의 마지막 연인은 의상 디자이너 아일린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게리쿠퍼가 죽은지 1년 후 친구에게 게리 쿠퍼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말한 후 니커보커 호텔 11층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는 낭설로 보이는데요. 게리쿠퍼의 와이프 삼촌이 세드릭 깁슨이며 그의 동생이 아일린 깁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조카 사위랑 내연의 관계라는 게,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여도 그렇지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네요.


또한, 훼밍웨이 역시 그가 죽은 뒤 1년 뒤 권총 자살을 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요. 이때문에 훼밍웨이와 게리쿠퍼의 때아닌 동성애설까지 퍼질 정도였지만 그것 역시 아닌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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