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로 잘생긴 남자 알랭들롱

 20세기 최고로 잘생긴 남자 알랭들롱은 모든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남성들은 그처럼 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그에게 익숙한 외롭고 반항적인 이미지는 그가 그 길을 걸었기 때문에 익숙하고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로 수많은 여자를 만나고 다닌 걸로도 유명하지만 그를 만났던 여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사랑한 남자, 자신의 마지막 남자, 다른 사람을 만나도 절대 잊지 못하는 남자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매력이 넘친 남자였다고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배우


또한, 1960년대에서 70년대 유럽은 물론 세계 전역에 미남의 대명사는 알랭들롱이라는데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자국인 프랑스에서 그는 남성 브리지트 바르도로 불리기도 했으며 흠잡을 데 없는 외모와 패션 감각으로 프랑스 미를 대표한 배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마치 프랑스 최고 특산물이 알랭들롱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 보였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에서는 그의 이름이 들어간 격언이 생길 정도라고 했으니까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알랭들롱




알랭들롱은 1935년 11월 8일 프랑스 파리에서 약간 떨어진 오드센 주 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풀 네임은 알랭 파비앙 모리스 마르셀 들롱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극장 주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전문 교육을 받은 약사였으나 결혼 후 극장에서 티켓을 파는 등 관리자로 일했습니다.



알랭 들롱이 네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그의 부모는 이혼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그 도시의 유명한 정육점 가게 주인과 재혼하였습니다. 그의 엄나는 극장 관리에서 소세지 판매를 하면서 남편의 일을 도와주느라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아들을 돌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모 네로 부인을 고용하였고 알랭은 그녀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몇 년 후 네로 부인이 사망하면서 알랭들롱은 다시 방치된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퇴학과 탈영의 성장기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알랭들롱은 항상 말썽을 일으켰고 반복적으로 학교를 퇴학당하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14살에 소년원에도 다녀왔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는 글렀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소세지 장사를 가르쳤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아들이 너무 잘생겨서 하도 그를 만지는 통에 그의 어머니는 만지지 말라는 팻말을 달아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배움이 없어도 많이 배운 것 같고 아무 옷이나 막 걸쳐도 귀티와 세련됨이 철철 넘치던 알랭들롱은 지속적으로 반항기가 가득했고 17살 어린 나이에 전쟁중인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하길 원했습니다. 일종의 객기였지만 의붓아버지는 이참에 잘됐다고 여겨 허락하고 그의 엄마도 말리지 않고 입대에 동의하여 군대에 가게되었지만 이후 엄마가 자신에게 애정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뼛속깊이 증오했다고 합니다. 그는 입대 후 인도와 중국 등에서 해병으로 복무했지만 그 버릇이 어디 가나요?



알랭들롱 경력의 시작



그는 복무 중에도 탈영 등 훈육되지 않은 여러가지 사고를 치는 바람에 복무 기간 중 사분의 일을 감옥에서 보내야했고 결국 1956년 불명예 제대를 하였습니다. 제대 후 돈이 하나도 없던 그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식당 웨이터부터 짐꾼, 하역작업, 접시 닦이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마 이 시기에 암흑가에 연계된 일을 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턱에 있는 칼자국이나 훗날 보디가드 살인사건 연루 등에 휘말린 것도 이 무렵 몸담은 마피아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여배우 여친 브리지트 오버와 몇 달 교제를 하였고 그녀와 함께 칸 영화제를 따라가면서 그의 배우 경력이 시작됩니다.


먼저 그를 알아본 사람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감독 셀즈닉이었고요. 그는 스크린 테스트 후 3개월동안 영어를 배우는 조건으로 헐리우드에서 7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배우기도 전에 프랑스 유명 영화 감독 이브 알레그레가 알랭들롱에게 미국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경력을 쌓자고 제안하여 셀즈닉은 계약 취소에 동의하였고요. 그렇게 1957년 여자가 다가올때란 영화에 주연으로 데뷔를 하였습니다.



숱한 여성 편력


그리고 그의 첫 영화가 재밌었는지 그의 연기가 어땠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그의 완벽한 외모에 넋이 나갈 뿐이었습니다. 177센티미터의 키에 균형잡힌 몸매와 매우 매력적인 이목구비를 가진데다 분위기마저 오감을 자극하는 절대 미남이었던 겁니다.





영화로 얼굴이 크게 알려지기 이전에 1958년에 찍은 영화 크리스티나에서 만난 독일 배우  로미 슈나이더와 만나 연인이 되었습니다. 로미 슈나이더는 배우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여배우였는데요. 둘은 서로 사랑에 빠져 파리로 건너와 같이 살게 됩니다. 



리플리 증후군 창시자


그리고 1960년에 개봉한 태양은 가득히에서 알랭들롱은 비로소 평단의 호평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스물 다섯의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유혹적인 남성이란 칭호를 얻기도 했는데요. 리플리 증후군이란 신조어를 낳은 영화이며 1999년 리플리란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어 맷 데이먼이 그 역할을 맡기도 했죠.


영화 태양은 가득히 이후 알랭들롱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잘생긴 배우로 크게 성공한 그는 예상한 것처럼 여성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1959년부터 5년간 교제한 로미와 알랭들롱은 거기까지가 끝이었습니다. 로미와 사는 동안 독일가수 니코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출산하였고 물론 알랭은 인정하지 않고 친자소송까지 갔지만 얼굴이 빼박이라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 같고요. 1964년 로미가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이 애딸린 이혼녀 나탈리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알랭들롱은 나탈리와 함께 멕시코로 간다는 편지만 남겨 놓고 떠났습니다. 이에 화답하는 차원으로 로미는 손목을 그었다고 합니다. 



알랭들롱은 숱한 연애를 했지만 결혼은 단 한번 나탈리와 한 것 뿐이었습니다. 둘 사이에는 아들 안토니를 낳았지만 알랭들롱의 여성 편력으로 4년 후에 헤어졌습니다.


알랭들롱의 매력


알랭들롱이 입장하는 곳에는 항상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그가 음식을 쳐다보고 있으면 직원이 음식을 알아서 갖다 주었고 옷가게의 옷을 보고 있으면 옷을 주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여배우 미레이유 다르크와 동거 중에는 살인 용의자로 수배 중이었음에도 모두가 그에게 죄가 있을리가 없다며 현실 부정을 하였고요.


상습적인 바람둥이 기질에 자신의 이름을 3인칭으로 부르는 귀척 화법에 탈세는 기본이고 입만 열면 뇌순남 모드로 무식이 넘치는 남자였지만 그와 헤어진 여자들은 그에 대해서 한번도 나쁘게 얘기한 적이 없고 오히려 관계를 더 유지하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요절한 로미슈나이더는 죽기 얼마 전에 알랭들롱을 못 잊어서 자신의 삶이 추락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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