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보이의 대명사 미국의 힘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 존 웨인에 관하여

 귀족의 작위 공작을 의미하는 듀크라는 별명을 지닌 존 웨인은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에서 시작하여 1940년대부터 197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배우였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어 존 웨인 공항도 있고 동상은 물론 그에 관한 문화 유산은 미국인의 자랑이자 자부심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어쩌다 배우가 된 존 웨인




어찌보면 배우란 직업은 우연한 계기 혹은 불의의 사고에 의해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직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발레를 하다 부상으로 여배우가 된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요. 남성 배우 중에도 운동 선수였다가 부상으로 배우가 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요. 존 웨인도 그런 경우에 속했습니다.

존 웨인도 대학시절 미식축구로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다 서핑을 하다 어깨가 심하게 탈구되면서 선수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학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 그의 평생 직업이 되었습니다.


팀에서 해고되고 학비를 벌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가려고 밀항하려다 잡혀서 체포되어 캘리포니아로 다시 보내졌고 그곳에서 그는 소품 부서에서 일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폭스와 계약하게 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1907년 5월 26일 미국 아이오와주 윈터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마리온 로버트 모리슨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혈통의 남북전쟁 참전용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혈통이었으며 장로회 개신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는 훗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는데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강한 남성을 상징하는 그는 태어날 때부터 13파운드의 상당한 우량아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십대 때 이미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었고요.

그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가족들은 캘리포니아의 랭케스터로 이주했습니다. 본래 그의 아버지 직업은 약사였지만 돈을 잘 관리하지 못했던지 농부로 정착하려고 했지만 정착에 성공하지 못하고 몇 년 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글렌데일로 다시 이사하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돈 버는 능력이 없던 것인지 존웨인의 어릴 때 삶은 가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지역 스튜디오에서 구두를 닦아주며 용돈을 벌기도 하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날 때부터 인싸


글렌데일에 살면서 존 웨인은 독특한 별명을 얻었는데요. 강아지를 너무 사랑한 그는 항시 그의 반려견 두 마리를 데리고 다녔는데요. 큰 개의 이름은 빅듀크, 작은 개의 이름은 리틀듀크였습니다. 그래서 반려견 주인인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듀크라고 부르게 된 것이 그가 성공한 뒤까지 이어진 듯합니다.



남다른 체력과 운동 감각을 지닌 그는 고등학교 때 상당히 액티비티하였고 특히 미식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합니다. 학교 연극 제작 행사에도 많이 참여하면서 인싸의 전형을 보였는데요. 그중에서 미식축구를 워낙 잘했던지 명문대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에 축구 장학생으로 다니게 됩니다.

본래 그는 해군 장교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사관학교에 떨어진 후 법을 공부하기 위해 축구 장학금을 받으며 서던 대학에 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해군 장교 얘기는 회사에서 지어낸 얘기이며 그는 줄곧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유명한 배우가 될 생각은 없던 것 같습니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독보적인 스타였던 그는 대학에 입학한 후 존웨인은 보다 강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였는지 인싸 남학생들만을 위한 프랫터니티 사교클럽 시그마 치에 가입하게 됩니다. 상상만해도 활력이 넘치는 멋진 대학 생활을 한 것 같은데요. 그러나 2년 후 그는 서핑을 하다 심한 어깨부상으로 미식 축구 팀에서 해고되며 시련을 겪게 됩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던 그는 학비를 벌려고 뭐든지 해야했고 주변 환경과 고등학교 때의 경험을 살린 탓인지 영화 제작 스탭 및 영화 엑스트라 등을 닥치는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영화 일을 하고 싶어서 폭스사와 계약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서부극 장르에 큰 족적을 남긴 존 포드 감독과 알게 되면서 평생 인연을 만들었고요. 그의 추천으로 빅 트레일의 오디션을 받고 주연 배우가 되어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존 포드 감독이 존 웨인을 키워주고 빅 트레일의 라울 월슈는 그를 발견하고 데뷔 시켜 준 감독입니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본명 대신 존 웨인이란 이름을 쓰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어려움과 실패를 겪고 워너브라더스와 새롭게 계약을 맺었고요.


서부극의 제왕이 되기까지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었다기보다는 당시 인기있던 서부극을 주로 맡으며 B급 영화배우로 혹은 서부극에 특화된 배우로 알려졌습니다. 현재까지도 서부극하면 존 웨인이 떠오를 정도로 그가 등장하지 않은 영화가 없을 정도로 다작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그냥저냥한 배우로 마감하나 싶었는데 1939년 그의 오랜 친구 존 포드 감독이 영화 '어덜트'를 같이 찍자고 하네요.





그리고 1939년 개봉한 이 영화는 엄청난 흥행을 하게 되고 이후부터 존 웨인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전설로 남게 됩니다. 아카데미상은 덤이었고요. 다음 해 찍은 영화에서도 그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1940년 영화 세븐 시너스에서 당대 최고 여배우 마를렌 디트리히와 함께 작품을 찍었는데요. 이둘의 남다른 케미는 영화 밖에서까지 이어진 듯합니다. 물론 존 웨인은 유부남이었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둘은 깊이 사랑했고 육체적인 관계 이후에도 둘은 좋은 친구로 남았고 이후로도 두 개의 영화를 함께 찍었습니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그의 명성과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전쟁 영화의 달인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촬영 중 귀를 다쳐 군 면제를 받았다고 하네요.



존 웨인은 1979년 6월 11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세번의 결혼 중 두 번의 결혼을 하였는데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산 첫 번째 아내 조세핀 사엔즈와 사는 동안 두명의 딸과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내인 페루 출신 여배우 필라 팔레트 사이에서 세 딸을 낳았습니다.


그가 죽은 지 근 30년이 지났을 때까지도 그는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 다섯손가락 안에 들었으며 죽은 사람이 인기 투표 상위를 차지한 유일무이한 배우이기도 했답니다. 얼마나 대단한 배우였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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