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를 대표한 귀족적이면서 실제 귀족이던 모델 피오나 켐벨 월터
피오나 켐벨 월터는 1950년대 화려한 시대를 완벽하게 대변하며 신비롭고 미묘한 관능미에 귀족적인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매력의 소유자입니다.
태생부터 남다른 피오나 켐벨 월터
세련된 마스크와 숙녀같은 정숙한 매력을 지닌 그녀는 1932년 6월 25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영국의 해군 장교 출신에 엘리자베스 2세의 보좌관 출신이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남작 에드워드 켐벨 경의 장녀로 완벽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빼어난 매력과 더불어 혈통 좋은 모델을 선호하던 시기였기에 피오나 켐벨은 모델로서 외모나 집안 어느 것 하나 빠질 것 없는 최적의 조건이었던 겁니다.
그녀의 엄마는 딸에게 모델을 권유했고 엄마가 지원하는 만큼 십대에 시작한 그녀의 모델 세계 입문은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1953년 1월 그녀는 라이프 잡지 표지에 실렸고 보그지를 장식하게 됩니다.
피오나 켐벨은 당대 잘나가던 포토그래퍼 및 패션 디자이너들의 사랑을 가득 담았습니다. 그녀의 세련된 미모는 그 시대를 더욱 빛이나게 하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억만장자 바람둥이와 결혼
그녀의 화려하고 독보적인 패션 모델 활동과 더불어 결혼 생활도 남달랐습니다. 그녀는 1956년 9월 그녀 나이 스물 네살에 서른 다섯살의 스위스의 억만장자 아니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남자일지도 모르는 한스남작의 세 번째 부인이 되면서 모델 생활은 은퇴하게 됩니다. 참고로 이둘은 만난지 12시간만에 결혼을 강행하였다고 합니다.
둘의 첫 만남은 스키 슬로프였고 그날 오후에 결혼식을 한 것이죠. 하지만 결혼 후 은퇴 후에도 그녀의 영향력은 막강했습니다. 세계에서 여왕 다음으로 제일 큰 규모의 미술관을 소유한데다 여행과 사교 생활 등으로 부유한 상류층의 문화 생활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고요.
부부는 두 딸을 낳았고 9년 후인 1965년에 이혼합니다. 모두가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고 하는 걸보면 예견된 이별이었나 봅니다.
이혼 후 사귄 16살 연하의 억만장자 애인
1969년 봄에는 주변 세계를 놀라게할만한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그녀의 첫 남편도 세상 둘도 없는 부자였지만 이번에 그녀와 교제한 남자는 선박왕 오나시스도 아니고 그의 유일한 아들이자 상속자 알렉산더 오나시스가 결혼을 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 입장에서는 친구의 아들과 사귀게 된 것인데요. 자그마치 둘의 나이차는 16살이나 났습니다.
젊고 매력있는 부유한 상속자가 서른 일곱살의 남작 부인에게 끌릴 만큼 피오나가 아름다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피오나 입장에서 좀 더 절제를 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미 충분한 재력을 지녔음에도 돈이 많고 전남편보다는 훨씬 젊은 베이비 청년과의 열애로 그와 그의 아버지는 엄청난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둘이 그러한 가운데 알렉산더는 1973년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개인 비행기를 타고가다 추락하여 사망하고 맙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그녀는 그리스 미코노스 섬으로 가서 살았고 그녀의 딸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 카를 폰 합스부르크 대공인 엄청나게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면서 가문의 전통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딸도 역시 얼마 후 이혼하였습니다.
공식적인 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잊힌 그녀는 아주 드물게 공식석상에 나올 때 사진이 찍힌 모습을 보면, 백발이 되어도 여전히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매력이 한껏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력셔리함의 끝판왕 인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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