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연인 메리 픽포드 이야기
메리 픽포드는 무성 영화 시대에 가장 유명한 스타였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소녀 가장 역할을 하느라 학교도 다니지 못했지만 타고난 영특함으로 자수성가한 대단한 배우입니다. 성공한 배우를 뛰어넘어 창의로운 제작자에 노련한 사업가이기도 했습니다.
메리 픽포드의 성장 배경
메리 픽포드의 본명은 글래디스 루이스 스미스이며 1892년 4월 8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습니다. 삼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으며 여동생은 한 살 어린 로티이고 남동생 잭은 1896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녀 나이 겨우 세 살 때 그녀의 알콜 중독자 아버지는 가정에 소홀했습니다. 혹자들은 그녀가 흙보다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했을 정도로 태어난 환경이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어린 메리도 죽기 일보 직전으로 병든 아이였습니다. 메리는 폐렴에 디프테리아, 결핵 등으로 가족과 격리된 채 치료를 받고 있었고 그 무렵 그녀의 아버지는 지역 증기선에서 일하던 중 머리를 부딪혀 혈전을 일으켰습니다. 6개월 후 그는 뇌출혈로 사망하였습니다.
무능한 아버지의 죽음이었지만 그녀 가족에게는 끔찍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뜩이나 가난한 메리의 집안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병원비로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은 후유증과 슬픔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막내 동생마저 치명적인 병에 걸렸고 그녀의 엄마는 생계를 위해 어떤 일이든 해야 했습니다.
메리 엄마는 어떻게든 연명하려고 집에 하숙을 쳤는데 그녀의 하숙인 중 한명이 극단 무대 관리자였고 어린 메리픽포드와 여동생 샬롯을 아역배우로 캐스팅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녀의 엄마는 극단 오르간 연주자로 영입하면서 가족이 일을 하게 되었지만 사실 제작사가 원하는 배우는 메리픽포드가 유일했습니다.
독학으로 글을 읽고
몸도 허약한데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에 찢어지게 가난한 삶 속에서 메리는 학교를 거의 다닐 수 없었지만 독학으로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촬영으로 인해 기차를 오래 탈 때는 책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낼 정도로 독서광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일찍 세상을 터득한 그녀는 방을 싸게 구하는 법부터 음식을 저렴하게 먹는 법 등 지혜롭고 알뜰살뜰한 소녀 가장으로 최선을 다했고 엄마와 동생들을 거느리고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의젓하게 굴었습니다.
성공한 배우의 삶과 결혼
아역 배우부터 출발한 메리픽포드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성공한 배우로 한국의 최진실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만인의 연인으로 불리며 넘치는 사랑을 받던 메리는 이제 한 남자의 연인이 되고 싶다고 하였고 1911년 아일랜드 태생의 무성영화 배우 오웬 무어와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오웬은 무능했고 자신의 무능을 알콜로 달래며 잘 나가는 메리픽포드를 괴롭혔고 결국 이들은 몇 년 동안 별거에 들어갑니다.
그런 과정에서 라이징 스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불륜에 빠지게 됩니다. 각자 배우자가 있던 이들은 은밀한 교제를 하다 1920년 메리픽포드는 1920년 3월 2일에 오웬무어와 이혼하였고 3월 28일에 페어뱅크스와 재혼했습니다.
이혼한 스타는 성공할 수 없다는 불문률을 깨고 불륜으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재혼했음에도 그녀의 인기는 오히려 더 치솟았습니다.
오히려 배우 명문가 더글라스 집안과 결혼하면서 헐리우드 왕족으로 환영받을 정도였습니다. 이들이 유럽으로 신혼 여행을 갈 때는 수많은 팬들이 그녀 주변에 몰려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을 만지기 위해 아우성이었고 겁에 질린 메리는 군중으로부터 구출이 될 정도로 그녀의 인기는 엄청났습니다.
재혼한 이 커플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유럽의 국가 원수들이 백악관을 방문해서 비버리 힐스에 있는 픽포드 부부의 저택을 방문하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에 초대된 손님들은 과히 전설로 남을 정도라고 하는데요. 조지 버나드쇼부터 알버드 아인슈타인, 엘리노어 글린, 헬렌 켈러 부터 스콧 피츠제럴드에 아서 코난 도일 등 당대 최고 유명인사들은 다 모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녀가 더글라스 집안의 왕족으로 지낸 기간은 4년에 불과했지만 그 기간이면 충분히 만끽한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죠.
물론 이들이 헤어진 이유는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의 바람끼 때문이었고 1930년대 초 영국의 배우 실비아 애슐리와의 불륜이 언론에 공개된 후 메리픽포드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들의 이혼 과정은 길게 이어지다 1936년에 최종 마무리됩니다. 참고로 실비아 애슐리는 클라크 게이블의 세번째 부인으로 사치스러운 것으로 유명했죠.
멈추지 않은 열정
1933년 마지막 영화를 찍고 그녀는 배우 대신 창조적인 제작자로 업그레이드 되었고 1941년 독립 영화 제작자 협회의 설립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우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기에 결코 뿌리와 겸손을 잃지 않았으며 늘 자선 활동에 넉넉한 인심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가 오랫동안 대중에게 사랑 받은 이유이기도 하고요. 물론 그녀가 엄청난 금액의 기부를 하는 것에 결코 호들갑을 떨지 않았습니다. 조용하게 뒤에서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지만 좋은 일은 금방 소문이 나기 마련이지요. 또한, 영화 산업 발전을 위해 정말로 다양하고 많은 일을 기획하고 참여하였기에 그녀에 대한 존경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이자 마지막 남편은 배우이자 밴드 리더인 로저스하고는 1937년 6월에 결혼하였는데요. 이들은 1943년에 5살 아이를 입양하였고 다음 해에 갓 태어난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엄마는 1928년 유방암으로 사망했고 몇 년 후에는 남동생이 허약함을 이기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고 3년 후인 1936년에는 여동생 로티가 알콜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전 남편 더글라스 페어뱅크스가 향년 56세에 뇌졸증으로 사망하였는데요. 메리픽포드는 남편 로저스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졌다며 울었다고 합니다. 메리 픽포드와 로저스는 픽포드가 1979년 뇌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40년을 넘게 함께 지냈습니다.
그녀의 엄청난 추진력과 놀라운 재능 그리고 빛나는 지성으로 누구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기에 많은 후배들이 여전히 그녀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칭찬과 존경이 끊이질 않습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