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미의 상징 소피아 로렌 스토리
1951년 15세때 데뷔하여 70평생을 최고의 배우로 살다간 소피아 로렌 스토리입니다.
가난하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
소피아 로렌은 1934년 9월 2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소피아 비야니 시콜론으로 태어났습니다. 소피아 로렌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한명으로 여겨지지만 그녀를 처음 받은 산파는 그녀를 역대급 못생긴 아기로 기억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소피아 로렌의 아버지는 매력적인 귀족 출신이지만 여배우들과 연애하고 싶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한량이 따로 없었고요. 거기 낚인 여자가 바로 소피아 로렌의 어머니였습니다.
소피아 로렌의 어머니는 그레타 가르보를 닮은꼴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여배우 지망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소피아는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줄행랑을 쳤습니다.
이탈리아에는 한번 결혼하면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동거만 하고 산 부부가 많았다고는 하지만 소피아의 아버지는 그런 차원은 아니었던 것 같고요. 소피아는 평생 아버지를 딱 세 번 밖에 보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래서 아버지 연배의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 것도 있었을테지요.
소피아 어머니는 홀로 두 자매를 키우며 빠듯하고 억척스럽게 살았습니다. 시기적으로도 전쟁과 가난 그리고 폭행의 공포로부터 자식들을 지켜야 했고요. 전반적으로 소피아 로렌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고달팠습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던 소피아 로렌은 극도의 가난 속에 성장하였고요. 외가댁에서 여러 사람들과 같은 지내며 못 먹고 못 자라 어릴 때 별명이 이쑤시개였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로렌 가족은 나폴리로 이사하였는데요. 할머니가 그곳에서 펍을 열고 가족이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이어갔는데요. 아마도 소피아 로렌의 끼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14살 무렵이 되자 하룻밤 사이에 말라깽이 소녀에서 풍만한 여성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녀 자신도 몰라보게 바뀐 모습에 신이 나서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고 합니다. 그녀 뒤에서 휘파람을 불면서 따라다니는 소년들도 귀여워보였겠죠.
그리고 같은 해 지역에서 주최하는 바다의 여왕 미인대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드레스 살 돈이 없던 그녀와 가족은 할머니의 기지로 집안에 있는 분홍색 커튼으로 드레스를 만들어 주었고 그녀의 유일한 신발 한 켤레를 흰색으로 칠하고 대회에 나갔답니다. 제발 비가 오지 않길 기도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였답니다.
소피아 로렌의 야망
그리고 1950년 그녀가 15살이 되었을 때 로렌과 그녀의 어머니는 생계형 여배우가 되기 위해 로마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1951년 쿠오바디스 영화에 엑스트라로서 첫 출발을 하였고요.
1951년 그녀가 16살이 되었을 때 콜로세움 근처 식당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39살의 이탈리아의 능력있는 제작자가 뚱뚱하고 아담한 체구를 하고 그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그를 경계의 시선으로 대했지만 그녀에게는 분명한 야망이 있었고 그도 그녀의 성공하고 싶은 열망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카메라 테스트를 받아 보게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카를로 폰티처럼 그녀에게 매료되지는 않았나 봅니다. 카메라맨은 그녀에 관해서 얼굴은 너무 짧고 입은 너무 크고 코는 너무 길어요, 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지지않고 다가가 물었답니다. 그래서 제 잘못이 무엇인가요?
어쨌든 폰티의 애인이 된 소피아는 이후 아주 빠르게 영화계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1952년 파라마운트사와 계약하고 작은 역할을 맡다가 1953년 영화 아이다에서 주인공을 맡았고 같은 해 나폴리의 황금이란 영화로 이탈리아 영화계의 라이징 스타가 되었습니다.
영화계 거물 폰티와 소피아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이혼이 불법이던 보수적인 이탈리아에서 둘의 관계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을 테고요. 헐리우드로 건너와도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사람이 바로 대배우 캐리 그랜트 였습니다.
하지만 1957년 함께 작업하면서 오십이세의 캐리 그랜트는 소피아 로렌에게 완전히 반해 버렸습니다. 소피아 로렌의 나이는 스물 두살이었고요. 나이가 있어도 소녀들이 반할 만한 매력적인 캐리 그랜트는 소피아 로렌 그리고 카를로 폰티는 졸지에 삼각관계에 빠지게 됩니다.
소피아 로렌은 잠깐 캐리에게 흔들리기는 했지만 오십이세보다는 마흔네살의 뚱보 폰티를 선택하였습니다.
잠시 흔들렸던 것에 미안했던 것인지 1957년 카를로와 소피아는 맥시코에서 결혼을 하였고요. 이 소식을 들은 캐리는 신사적으로 단념하고 소피의 행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1962년에 법적으로 무효가 됩니다. 보수적인 이탈리아인이 소피아 로렌을 중혼죄로 기소하는 등 괴롭힘이 끝이 날 것 같지 않자 카를로의 전처이자 변호사이던 줄리아는 해결책을 찾았고.
셋이 이혼이 합법적인 프랑스까지 가서 이혼과 재혼을 하면서 카를로와 소피아는 프랑스 시민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1968년 첫 아들을 낳았고 1973년에 아들을 하나 더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고국 이탈리아는 끊임없이 이들을 괴롭혔나 봅니다. 1977년에 카를로는 불법적인 통화 거래를 비롯한 수많은 범죄를 핑계로 그를 기소하고 재산을 압수하였고요. 1980년에 소피아 로렌은 탈세로 17일동안 감옥에 갇히는 등 수난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30일동안 갇힐 것을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풀려났지만 1982년 비행기 타기를 거부하는 그녀의 어머니를 영원히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돌아와 교도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그녀를 사랑하는 수많은 팬들은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주어서 축하를 받는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팬들은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창문 아래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등 이벤트를 벌였지만 감옥에서 소피아는 극도로 괴로웠다고 합니다.
소피아 로렌은 가정에 충실한 아내이자 어머니였고 아이를 양육하는 동안은 일도 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카를로와 소피아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그녀와 함께 작업한 동료 남자 배우들은 그녀에게 매료되고 사랑에 빠졌을 수는 있지만 그녀는 그들과 한번도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미의 상징이자 최고의 배우
1958년은 그녀가 글로벌한 스타로 부상한 해였습니다. 그녀는 서른 전에 백만달러를 넘게 번 최고로 성공한 배우였고 수많은 영화 히트와 수상 등으로 부와 명성 그리고 비록 프랑스인으로 귀화했지만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의 상징으로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에는 탈세 혐의로 17일간 감방 생활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밖에 영화 촬영지에서 도둑이 그녀의 값비싼 보석을 훔쳐가기도 했으며 또 다른 촬영지에서는 가스에 질식되어 죽다 살아난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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