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킨백의 조상이며 그녀 스타일의 뱅헤어를 유행시킨 프렌치 시크 제인 버킨
영국 태생이지만 프랑스에서 평생을 살았고 앵글라이즈란 애칭과 함께 프렌치 시크를 상징한 제인 버킨이 2023년 7월 1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76세로 떠난 그녀의 죽음이 안타까우면서도 누구보다 멋지고 빛나게 살다 간 그녀를 추억해 봅니다.
버킨백의 조상 그리고 무심한 뱅헤어 스타일 창시자
제인 버킨은 프랑스에서 제일 유명한 스타 중 한명이지만 한국에서는 많이 익숙한 스타는 아닙니다. 하지만 에르메스 버킨백의 바로 그 버킨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네. 바로 버킨백 탄생에 영감을 준 아티스트가 바로 제인 버킨입니다.
제인 버킨은 1960년대 가장 잘 나가던 배우, 아니 배우라고 단정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의 스타였습니다. 영국적인 우아함, 자연스럽고 무심해 보이는 패션 스타일 그리고 지독히 수줍은 성격임에도 사회적, 인도주의적 발언과 무브먼트에 동참한 그녀는 다소 아쉬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인 버킨의 출생 배경과 결혼 이야기
제인 버킨은 1946년 12월 14일 영국 런던에서 아름다운 여배우와 해군 장교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오빠는 훗날 시나리오 작가겸 감독이 되었고요. 이렇게 엄청나게 부유한 집안에 예술력까지 갖춘 로얄패밀리로도 유명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어릴적부터 행복한 사고에 이끌려 삶을 살았지만 학창 시절은 잔인하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괴롭힘을 당했던 이유 중 하나는 중성적인 체형때문이었다고 하는데요. 밋밋한 체형으로 인해 반은 남자 반은 여자라는 놀림을 당했고 그것이 제인을 좌절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엄마를 닮아 어릴 때부터 연기에 관심이 있었고 모델과 연극 배우로 일을 시작한 그녀는 영국에서 꽤 일찍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그리고 스무 살도 안 되어 영국의 작곡가 존 배리와 결혼하여 딸 케이트를 낳았지만 존 배리는 제인이 임신한 직후 그녀를 떠났습니다.
짧지만 불행했던 결혼 생활 이후 1969년 영화 슬로건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그녀는 운명적인 연인을 만나게 됩니다. 프랑스에서 최고로 유명한 배우이자 가수 그리고 작가에 많을 일을 한 천재 방탕아 갱스부르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는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갱스부르는 이미 두 번의 이혼 경험이 있고 그녀보다 스무 살 이상이 많았지만 둘은 뜨겁게 그리고 알차게 사랑했습니다. 갱스부르의 뮤즈였던 그녀는 그와 함께 많은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이 함께 노래도 부르고 영화도 작업하고 사진도 찍고 등등 창작의 욕구를 분출시킨거죠.
이들은 사랑하는 딸 샤를로트를 낳았고 12년동안 사랑했고 함께 일했으며 헤어진 뒤에도 끈끈한 파트너십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갱스부르의 바람기와 약물 중독을 참을 수 없던 그녀는 다른 남자 아이를 임신한 채 그를 떠났습니다.
그녀의 세 번째 남자는 바로 유명 영화감독 자크 두아용이었고 버킨은 세 번째 딸 루 두아용을 낳았습니다. 각각 다른 남자에게서 낳은 그녀의 세 딸 중 첫째 딸은 패션 포토그래퍼로 활약하다 2013년 46세의 나이에 아파트에서 추락하여 사망하였습니다. 자살로 추정되지만 제인은 믿기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제인은 그녀를 위한 음악을 만들고 케이트를 자신이 만든 것 중 가장 아름 것이라며 항상 그녀의 12살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케이트의 죽음에 제인이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잘 알려지진 않은 사실이지만 보헤미안 부모를 둔 케이트는 어릴 때부터 약물과 알코올에 빠져 지낸 후 중독에서 벗어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자유롭고 선정적인 작업을 하는 부모 밑에서 케이트는 그들에 대한 선망과 정서적 혼란이 있었을테고요.
특별한 재주가 없던 그녀는 엄마의 지원으로 스물 여덟살에 패션 포토그래퍼가 되긴 했지만 항상 엄마와 잘 나가는 동생들의 그늘에 가려졌기에 그녀는 컴플렉스와 우울을 극복할 수 없던 것 같습니다.
케이트의 다른 자매들은 부모의 재능과 지원으로 배우와 가수 등 비교적 영향력있는 아티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스타일 아이콘
제인 버킨은 특출한 미인이라거나 완벽한 몸매 혹은 섹시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프랑스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스타로 군림했습니다. 흰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무심하고 헝클어진 듯한 뱅헤어 스타일을 창시하고 딱딱한 라탄 바구니를 항시 들고 다니면서 신선하고 기발한 룩을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뱅헤어 스타일이 그녀가 원조는 아니지만 제인 버킨 스타일의 앞머리는 그녀의 이름이 따라붙을 정도로 독창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인 버킨 이후로 이러한 뱅헤어 스타일이 세계 전역으로 유행하였습니다. 볼륨있는 몸매가 아닌 다소 남성스러운 몸매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라탄 백을 들고 다니는 모습도 신선함을 자극했고요.
또한, 갱스부르의 연인으로 지내면서,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파리에 입성한 그녀를 프랑스인은 매우 관대한 눈으로 대했습니다. 그녀의 어눌한 발음이 오히려 더욱 매력있게 와 닿았던 것 같고요. 특히 노래를 썩 잘 부르지는 않지만 속삭이는 듯한 노래와 억양에 대중은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뭘 해도 프랑스에서는 통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제인은 갱스부르의 그늘에만 있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 만의 스타일과 지성 그리고 에티튜드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버킨백 탄생 스토리
버킨백에 얽힌 스토리도 흥미롭습니다. 제인은 딱봐도 다소 어수선한 성향으로 보이는데요. 주로 기저귀 가방으로 라탄백을 이용하던 제인은 1981년 어느날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바구니 뚜껑이 열리면서 내용물이 바닥에 쏟아졌고 그녀의 물품을 줍는 것을 도와 준 사람이 바로 에르메스의 회장이었습니다.
이미 켈리백을 만들어 유명해진 터라 촉이 왔던지 그는 그녀에게 딱 맞는 주머니가 있는 백을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3년 후 유연한 재질의 가죽백은 그녀에게 선물되었고 이후로 제트족 여성들은 실용적이고 넉넉한 공간의 버킨백을 애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버킨백은 이후로 다양한 색상으로 출시되었지만 제인은 오로지 검정색 한가지 백만 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백에다 열쇠며 각종 엠블럼 등 자신의 스타일대로 덕지덕지 커스터마이징해서 들고 다녔고요.
그러다가 2015년에는 버킨백이 악어 가죽으로 만드는 것을 못 참겠다고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했다가 철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아무리 봐도 에르메스의 버킨백보다 라탄백이 더 멋져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패션 아이콘으로만 인식하기도 하는데요. 사실 그녀는 상당히 비중있고 엄청난 영향력의 배우이기도 했습니다. 14개의 앨범을 발매하고 7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도 노래도 계속했습니다. 2013년에는 국내 감독 홍상수의 작품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함께 작업한 적도 있고요.
버킨은 2002년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치료하였지만 2021년 뇌졸중을 앓았고 얼마 전 투어 공연을 앞두고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서 쉬다가 7월 16일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버킨의 감각적인 스타일은 둘째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고스란히 물려받아 패션 아이콘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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