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의 쾌감을 즐기던 불멸의 배우 제임스 딘 스토리
인간 세상에서 배우 제임스 딘만큼 멋지고 매력있는 사람은 없어보입니다. 그는 스무살에 데뷔하여 영화 3편을 찍고 24살에 요절한 그는 불후의 배우가 되었습니다.
속도의 쾌감을 즐기던 제임스 딘
비록 제임스 딘의 경력이 24살에 짧게 끝났지만, 그가 출연한 세 편의 영화는 그 배우를 전설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딘은 그의 원초적이고 남녀 누구에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쓸쓸한 매력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제임스딘은 스크린에서 십대들을 흥분시키는 불안의 원조였고, 먼 곳을 내다보는 것의 달인이었으며, 환상적인 머리결의 소유자였습니다. 소위 젊은 혈기, 반항기 가득한 표정, 고독한 잔상을 남기며 그의 애마 포르쉐를 타고 저 세상으로 간 비운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남녀 모두에게 매력이 넘쳤던지라 그의 성정체성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 서로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마치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성을 게이라고 단정한다거나, 게이 세계에서는 자신들과 같은 성향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확신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현재 양성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는 세상이 되었지요.
게이들의 우상 제임스 딘
하지만 개인적으로 의문이 드는 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수적인 나라에서, 그것도 부모 세대가 성적 자유가 아닌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신실하게 살았는데 어떻게 게이나 양성애자가 그리 많았던 걸까요? 아무래도 다양한 젠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여기저기 다 꿰어 맞추느라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현대 사회에서 제임스딘은 아직까지 게이들의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에도 그의 외모가 먹힌다는 의미겠죠.
제임스 딘의 출생과 비하인드 스토리
인디애나 주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제임스 딘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정착한 퀘이커 교도 부모 아래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농사를 짓다 아버지가 치과기공 기술을 배우기 위해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로 이주하게 됩니다. 엄마랑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딘은 엄마의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릴 때 탭댄스부터 바이올린도 배우는 등 다소 특이한 취미를 갖게 되는데요. 행복하던 시절도 잠시이고 그가 9살 때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제임스 딘에게는 불행이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양육을 포기하고 딘은 인디아나주에 있는 고모가 맡아 키우게 됩니다. 고모 부부도 독실한 퀘이커 교도였고 그 지역 사람들이 모두 독실한 신앙인이어서 제임스 딘도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성장했을 겁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딘이 각별했던 시기에 그가 털어 놓았다며 훗날 밝혀진 사실인데요. 소년시절 동네 교회 목사에게 추행 당한 적이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가 군대도 동성애를 핑계로 면제되었다고 한 말도 있었는데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릴 적 그런 공포가 작용해서 그렇게 둘러댄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가 성인이 될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고 다른 여자랑 살고 있었고요. 그래서 제임스딘은 어릴적부터 철저하게 고독했고 반항적인 기질로 자랄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변호사가 되기 위해 산타 모니카 칼리지 법대에 입학하지만 한 학기 후 UCLA 학교로 옮기고 전공을 드라마 연기로 바꾸고 그러면서 잠시 사이가 좋아지는 듯했던 아버지와 다시 멀어지게 됩니다.
연기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한 딘은 1951년 10월 뉴욕으로 이사하기 전에 몇 편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단역을 맡았습니다.
시간당 1달러 버는 주차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고군분투하는 연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당시 잘 나가는 여배우들의 눈도장이 필요했던것인지 그냥 젊은 혈기였던것인지 그들과 수위를 넘는 관계가 있었다고 하고요. 그러다 펩시콜라의 광고 모델을 하게 되면서 관계자들의 눈에 띄게 됩니다.
제임스 딘의 배우 생활
그러나 현재 우리가 아는 제임스 딘과 과거에 산 실제 그의 모습은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험프리 보가트도 173cm로 단신 배우에 속했는데 제임스 딘은 그보다 1cm 더 작았습니다. 아마 더 작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고요. 더군다나 당시 정장을 주로 입던 남성들 패션과는 다르게 맨발에 더러운 청바지 그리고 헝클어진 헤어스타일로 상당히 지저분한 스타일을 고수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매너를 중시하는 미국 사회에 걸맞지 않게 아무때나 전화하고 방문하는 등 무례한데다 감정 기복도 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어릴적부터 운동 신경이 남달라 못하는 운동이 없었고 특히 야구를 매우 잘했으며 고교 시절에는 대중 연설도 그렇게 잘했다고 합니다. 뭔가 상남자 포스가 느껴지는데요. 여자 관계도 매우 박진감이 넘칩니다.
그의 마지막 연인으로 이탈리아 출신 여배우 피에르 안젤리가 있지만 피에르 모친의 극심한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고 피에르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는데요. 그녀의 결혼식 날 오토바이를 부릉부릉거리며 훼방 비슷한 것을 놓고 갔다는 말도 있고요. 임신한 그녀의 뱃속의 아기가 자신의 아기라고 확신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에피소드도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딘은 실제와 은막의 이미지와 경계가 모호했기에 사람들이 더욱 현실과 환상 사이를 구분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의 첫 번째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은 제임스 딘의 삶 그 자체로 봐도 될 것 같고요.
제임스 딘의 매력과 불행
실제 딘의 아버지는 그가 18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고 그래서 딘의 성격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게 했습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에 대한 갈망, 어딘가 기댈 곳 의지할 곳 자신을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그런 것들이 격앙된 감정과 반항 그리고 거친 취미로 투영된 것이 아닐까요?
한국의 배우 최민수가 유명한 부모 사이에 태어났어도 예술인의 피만 물려주고 고아나 다름없게 방치하여 그가 한창 때 반항기 가득한 삶의 궤적을 남겼듯이 말입니다.
제임스 딘을 스타덤에 올린 영화 에덴의 동쪽에서 딘은 고통을 연기로 옮기는 능력을 인정 받으며 다른 배우와는 차별화된 매력을 보여줬습니다. 에덴의 동쪽은 성경 속 에피소드 카인과 아벨을 소재로 만든 영화인데 영화 속에서 차별 받는 형제 역할을 맡으며 버림 받은 감정을 그대로 녹여낸 것 같습니다.
그는 시무룩한 관능미, 반항기 가득한 오만함과 대범함 그리고 특유의 아우라가 있는 배우였습니다. 또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티셔츠, 청바지, 가죽 오토바이 재킷으로 그의 스타일 감각은 불멸할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면에서 자유롭고 반항이 넘쳤던
그리고 딘은 모든 면에서 반항아였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젊은 스타들이 기대했던 깔끔한 올 아메리칸 스타일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장에 늦게 도착했고 촬영장에서 종종 기분이 나쁘고 비협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얻은 돈을 고급 스포츠카에 썼고, 할리우드의 거리를 질주했습니다. 마치 삶 자체가 소중히 여겨지기보다는 가지고 놀아야 할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고통은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1955년 9월 30일, 딘은 자동차 경주장으로 가는 길에 그의 포르쉐가 그를 죽음의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그의 사후에 아카데미상 후보에 두 번 오른 유일한 배우란 것은 그에게는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임스딘의 배우 철학과 연애사
가뜩이나 외로움을 달고 태어난 딘은 배우에 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배우가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일입니다.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남자가 되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저는 제가 끝나기 전에 둘 다 되고 싶습니다."
단역배우 시절에도 톱 배우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라이징 스타가 된 후에도 조안 크로포드와 주디 갈란드, 엘리자베스 테일러, 마릴린 먼로 탈루라 뱅크헤드를 포함한 헐리우드의 잘나가는 여성들과 즐겼다고 합니다.
떠도는 소문일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있거나 없거나 예쁘면 다 취했던 모양입니다. 당대 활약한 흑인 여가수도 제임스 딘과 썸띵이 있었는지 사겼다고 말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시대상 그럴 확률은 극히 낮아 보입니다.
흑인 인종 차별로 벗어난 시기에 그로부터 한참 뒤였고 1950년대까지만해도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중가수로서 인기는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흑인끼리 백인끼리 맺어진 문화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흑인 여가수와의 관계설은 그 여가수의 관종짓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또한, 딘은 마릴린 먼로와도 열애설이 있었는데요. 먼로와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먼로는 그렇게 되면 서로를 파괴하게 할 것이라고 했답니다. 영화 촬영 중에 만난 유부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사랑의 도피도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불발에 그칩니다. 정황상 이런 복잡한 시기에 제임스 딘이 사고로 사망했는데요.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으려나요? 왠지 제임스 딘이 좋아한 여성상과 비슷한 것 같아서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결혼까지 갈뻔했던 안젤라부터 그의 마지막 데이트 상대였던 우슬라 안드레스도 있었습니다. 그의 사후에는 더 많은 여성은 물론 남성들이 나와 제임스 딘과 사겼다고 아우성이었고요.
우슬라 안드레스는 마릴린 먼로와 비슷한 이미지가 있고 엘리자 베스 테일러와 피어 안젤라 이미지가 비슷한 걸로 보아 제임스 딘의 취향이 이런 분위기의 여성을 좋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단 예쁘고 섹시한 것을 좋아한 젊은 남자였다고 봅니다.
예견된 속도의 끝
1955년 9월 30일 오후, 이미 교통 딱지를 한차례 받은 상태에서 사고가 나서 목이 부러지고 심한 내상을 입은 딘은 인근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사망 판정을 받았습니다. 죽음조차 극적으로 마무리된 그의 비극적인 매력이 불멸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딘이 처음으로 7천달러짜리 포르쉐를 장만한 후 그는 차가 자신처럼 불결해 보인다고 좋아했고 자신은 그 차 안에서 일주일 안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이 자살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운명이 비극적으로 짧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던 걸까요? 아니면 세상을 살기가 귀찮았던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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