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섹시했던 최고의 성형미인 마릴린 먼로 뷰티 스토리
60년대 최고 섹스 심볼이자 이후로도 수많은 짝퉁 배우를 양산하는데 일조한 마릴린 먼로는 1959년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로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로 등극합니다.
불행한 태생 마릴린 먼로
마릴린 먼로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성형 미인이며 책읽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1926년 6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 엄마 글래디스 펄 베이커는 멕시코 태생이지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멕시코 혈통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아이 아빠 이름은 글래디스 케이커였고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라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의 출생 증명서에는 친부가 마틴 에드우드 모텐슨이라고 적혀있고 아이 이름은 노마 진 모텐슨으로 불리게 됩니다.
평생 정신병원에서 보낸 마릴린 먼로의 엄마
마릴린 먼로의 친모는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태어난지 2주 밖에 안 된 아이를 이웃이 키우고 고아원에서 자라다 양부모 밑에서 자라는 등의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심지어 그녀 엄마는 마릴린 먼로를 칼에 찌르거나 물에 빠뜨리는 등 3차례나 죽이려고 시도했었다는 얘기도 있고요.
물론 그런 와중에도 정신이 돌아오면 딸을 맡아 키우려고 애썼지만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아서 키울 수 없었고 그녀는 결국 죽을 때까지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양부모에게 맡겨진 마릴린은 양부에게 어릴 때부터 추행을 당해왔고 보다 못한 마릴린의 이모가 잠지 맡아 키웠으나 거기서도 사촌이 마릴린을 추행하려고 하여 고아원에서 다시 지내게 됩니다.
그렇게 부모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불안정한 성장을 한 가운데 16살 고등학교 시절 21살의 남자 도허티를 만나 고교를 중퇴하고 결혼합니다.결혼해서 전업주부가 된 마릴린 먼로는 첫 결혼 생활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결혼이 나를 슬프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마릴린 먼로는 남편과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화가 나서가 아닌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1년 후 그녀의 남편은 공장 공돌이에서 해군으로 입대하였고 카탈리나 섬으로 가게 됩니다. 시댁에 살면서 마릴린도 군수공장에 취업합니다.
마릴린 먼로의 모델 데뷔 스토리
마릴린 먼로는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육감적인 몸매와 선한 눈매 그리고 웃음이 착해 보이고 헤퍼 보이는 느낌이 있을 뿐입니다.
마릴린 먼로는 곱슬곱슬한 빨간 머리를 밝게 염색하고 누구보다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델이 됩니다. 여기서 열정적으로 일했다는 것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여 성공을 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성상납을 해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녀는 1946년 모델 생활 반 년만에 서른 개가 넘는 잡지 표지를 장식하였고 그해 8월에는 20세기 폭스사와 계약을 맺고 기존 이름인 노마진을 없애고 마릴린 먼로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합니다.
영화사와 계약하면서 마릴린은 모든 것을 탈바꿈하게 됩니다. 머리색은 진할로우처럼 밝은 금발로 염색하였고 수차례의 성형과 체형 관리로 대중이 열광하는 섹스 심볼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먼로가 유명해질수록 남편과는 사이가 틀어졌고 둘은 결혼 4년 만에 이혼합니다.
마릴린 먼로의 스폰서
이제 갓 스물이 된 마릴린 먼로는 전성기를 향해 달려갑니다. 폭스와 계약한 이후 외모는 완벽하게 변신했지만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기에 콜롬비아 기획사로 옮겼으나 이곳에서도 별다른 작업없이 결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릴린 먼로에게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나게 되는데요. WMA 에이전시 부사장이던 조니 하이드였습니다. 그는 먼로의 매력에 반했을뿐만 아니라 그녀 인생에 측은지심을 느껴 그녀에게 조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서른살 연상의 그는 아내와 자식까지 있음에도 먼로에게 미쳐서 성형수술 비용은 물론 헤어드레서와 연기 선생까지 붙여주고 영화 배역까지 따게 해줍니다. 그리고 먼로에게 프로포즈까지 하지만 먼로는 더 큰 야망을 위해 그와 헤어집니다.
생각보다 긴 마릴린 먼로의 무명시절
마릴린 먼로는 생각보다 무명 기간이 긴 편이었습니다. 1950년 영화 아스팔트 정글에서 조연으로 호평을 받았고 이브의 모든 것에서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점차 섹스심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그녀가 무명 시절 찍은 누드 사진 파문이 일어납니다.
그녀는 전당포에 맡긴 차를 되찾기 위해 50달러가 필요해서 그런 것이라 대중에게 호소하여 그녀를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데 일조합니다. 그녀는 창간한 플레이 보이 커버에 누드 사진을 게재했고 역대급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마릴린 먼로의 성공적인 마케팅 방식은 많은 후배 연예인들이 차용하면서 성공하였는데요. 마돈나도, 패리스 힐튼도, 그리고 킴카다시안까지 마릴린 먼로가 했던 방식으로 호소해서 성공한 것을 보면 마릴린 먼로는 진정한 마케팅 천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독서광에 두뇌 천재
보통 마릴린 먼로하면 백치미를 연상하기 쉬운데요. 알고보면 그녀는 엄청난 독서광에 두뇌가 엄청 좋았다는 거 아시나요? 마릴린 먼로는 누드 사진 파문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개런티를 많이 받는 여배우가 되는데 비교 대상없이 독보적인 원탑 배우가 되었습니다.
이후 마릴린 먼로는 보다 과감하고 솔직하게 섹시함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외모도 매력적이었지만 그녀가 내뱉는 언어는 더 섹시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세상 멍청한 백치미를 보여줬지만 인터뷰를 할 때면 명쾌하고 절묘한 답변 일색이었습니다. 일상에서 책을 읽는 모습은 연출이 아닌 진짜로 독서에 열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고요.
그녀가 남긴 유명한 어록을 보면 잘 때는 샤넬 넘버5만 입고 잔다던가,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한, 마치 유명 카피라이터가 쓴 말 같은 명언도 많지만 누군가 함께 있어 불행한 것보다 혼자 있어 불행한 것이 더 낫다는 식의 철학적인 명언도 많이 남긴 걸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멍청한 섹시미를 연출할 수 있는 완벽한 천재였습니다.
최고의 사랑 두 번째 남편
하지만 그녀의 치밀한 성격과는 다르게 사랑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나 봅니다. 특히 육체는 감싸서 감추라고 있는 것이 아닌 보여주라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그녀 앞에 두 번째 남편이던 유명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와는 완전히 상극이었습니다.
대중이 사랑한 명장면인 통풍구에서 스커트 자락이 올라가 찍힌 사진을 보고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를 엄청나게 구타했습니다. 또한, 반복되는 유산으로 둘의 관계는 불행의 끝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마릴린 먼로는 점차 마약성 약물에 의존하기 시작하고 1954년 둘의 관계는 9개월만에 끝이 납니다.
세 번째 결혼
그리고 1956년 지적호기심을 자극한 극작가 아서 밀러와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됩니다. 먼로는 아서의 지성에 반했지만 아서는 마릴린의 변덕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1961년 둘은 이혼했고 이후 마릴린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게 됩니다.
1961년 마릴린은 당시 가장 핫한 정치인 케네디 형제의 장난감이 됩니다. 원숙미의 절정을 이룬 마릴린은 미래 대통령 존 케네디보다 동생 바비를 더 좋아했던 것 같지만요. 케네디 생일날 몸에 딱 붙는 드레스를 입고 해피 버스데이를 부른 마릴린 모습은 뇌쇄적이고 퇴폐적이며 위험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2022년 킴카다시안이 마릴린 먼로가 입던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지만 반응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다시 과거로 돌아가 케네디 형제는 기분이 나빴던 모양입니다. 뭔가 불편하고 찜찜한 기분이 들었던 거겠죠.
마릴린 먼로의 죽음
그리고 얼마 후 마릴린 먼로는 자택에서 손에 전화기를 들고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이 말하길 침대 근처에서 빈 수면제통을 발견했고 화장대에는 다른 14개의 빈 약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죽기 전 어떤 메모나 편지도 남기지 않았으며 먼로의 시신 부검 결과 사인은 약물 중독에 의한 심장마비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혈액에는 다량의 수면제가 발견되었지만 위장에서는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은 것도 의심스러운 정황이고요. 수면제 과다복용을 하고도 구토 흔적이 없이 얌전하게 죽었다는 점도 의구심을 증폭시켰습니다. 누가봐도 마릴린 먼로와의 스캔들은 대선을 앞둔 케네디 형제에게 부담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했고요.
그리고 마릴린 먼로는 조 디마지오와 다시 만나 결혼 3일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그 누구도 조 디마지오와의 연관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긴 하지만, 과한 집착이 있는 남자였던 걸로 보아 조 디마지오도 의심 선상에서 벗어나긴 힘들어 보입니다. 게다가 결혼 3일을 앞두고 신부를 혼자 둔 것도 내심 의심이 갑니다.
석연치 않은 죽음 뒤에 마릴린 먼로는 선행도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막대한 돈을 벌었음에도 방이 3개뿐인 작은 집에서 살았고 사치를 부리지도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한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똑똑했고 친절했고 의리있는 친구로 통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불행을 기억하여 아이들을 위해 많은 자선 단체에 기부한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물론 전쟁중이던 한국도 방문하여 위문 공연도 해줬고요.
또한, 공식적으로는 죽었다고 발표했던 마릴린 먼로의 엄마도 정신병원에 있었으며 마릴린 먼로보다 더 오래 살아 1984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마릴린 먼로와 외할머니도 같은 증상으로 평생 정신병원에서 보냈는데요. 물론 마릴린 먼로는 이들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예치해 두었다고 합니다.
1962년 8월 4일 36살의 나이로 사망한 마릴린 먼로를 따라 수백명이 독살로 자살하였고 먼로는 8월 8일 웨스트 우드 마을 기념 공원에 묻혔습니다. 장례는 조 디마지오가 치렀고 그는 평생 그녀의 무덤 앞에 장미꽃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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