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놀던 언니 그레이스 켈리의 남성 편력 스토리
부유하고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그레이스 켈리는 집안에서 독보적인 자식은 아니었습니다.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지만 다른 형제들이 그녀보다 여러모로 특출했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못생기게 태어났고 마르고 병약했고 성격도 소심한 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배우가 되겠다고 하니 그녀의 부모는 어처구니없어 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의 출생 배경
그레이스 켈리는 1929년 11월 12일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의 금수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정 선수로 금메달을 세 개나 딴 후 사업에 성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도 커버걸 모델 출신이자 수영선수였고 대학에서 체육을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부모뿐만 아니라 삼촌들 및 사촌들도 어마무시하게 잘 나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집안에 비해서 켈리는 속썩이는 문제아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라면서 어릴 때보다 외모가 나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눈에 띄는 미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화면발이 기가 막히게 잘 받았는지 스크린 속의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해 보였습니다.
겉모습은 우아했으나 사생활은 우아하지 못했던
그레이스 켈리가 스타가 되는데 막강한 기여를 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그레이스 켈리를 차가운 눈에 덮인 뜨거운 화산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부는 이 말을 두고 겉은 도도하나 속은 무척 헤프다는 의미라고도 하지만요.
한국에서도 놀던 사람들이 시집도 더 잘간다는 말이 있듯이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 배우입니다. 십대부터 문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던 그레이스 켈리는 집안의 문제아였습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그로 인해 더 엇나갔고 학업 성적마저 좋지 않아 퇴학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유난히 나이가 많거나 유부남에 집착한 그레이스 켈리는 정서적 안정이 필요했던 것인지 눈에 보이는 족족 남자를 만나고 다녔다고 합니다.
배우가 되기로 결심
그레이스 켈리는 연기자가 되고자 결심한 뒤로 18세부터 다녔던 뉴욕의 연극학교 강사이던 돈 리처드슨과 4년간 교제를 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그녀의 첫 남자는 아니었고 그녀의 첫 경험은 17세때 친구 남편과 가졌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리처드슨과 결혼하려고 했으나 그녀보다 10살이 많은데다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집안의 심한 반대로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런 식으로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남자가 50명은 넘는다고 그녀의 엄마가 말했다고 합니다. 연기학원을 다닐 때도 같이 다닌 남학생들 대부분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멈추지 않는 남성 편력
그레이스 켈리는 본격적으로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그녀의 남성 편력은 멈추질 못했습니다. 그녀의 첫 헐리우드 진출작 '하이눈'에서 상대 배우로 나온 게리 쿠퍼와도 교제하였는데요. 그레이스 켈리 나이 23살 때 게리 쿠퍼는 51세의 유부남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만난 상대는 1953년에 찍은 영화 '모감보'에서 만난 클라크 게이블이었고 그의 나이도 51세에 그녀 나이 24세였습니다. 1954년에 찍은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는 49세의 배우 레이 밀런드와 만나 교제합니다. 밀런드도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밀런드는 와이프와 별거에 들어가면서 그레이스 켈리와 함께 살 예정이었지만 그레이스 켈리 부모의 반대로 헤어지게 됩니다. 남자와 교제는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결혼만은 집안의 벽에 부딪혔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항간에는 밀런드가 막대한 위자료를 지불하는 것을 우려해 와이프에게 돌아갔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러한 스캔들을 언론이 가만둘 리 없었겠지만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고,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레이스 켈리는 이미지 좋은 빙 크로스비와 또 다른 스캔들이 나고 맙니다.
같은 해 배우 빙 크로스비와도 교제했다고 하는데 비교적 건전하게 교제했지만 잠은 말론 브랜드와 잤고요. 어쨌든 그녀는 빙 크로스비와 함께 찍은 영화 갈채를 통해 1954년에 아카데미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모가 결혼 허락을 했지만 그레이스 켈리의 변심으로 무산됩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빙크로스비의 친구 윌리엄 홀덴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헐리우드 동네 노는 언니 그레이스 켈리
그렇게 십대 때부터 동네 노는 언니로 나이 많은 유부남 킬러로 악명이 높았던 그레이스 켈리는 1955년 칸 영화제에 가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물론 이곳에서도 프랑스 배우 장 피에르 오몽과 염문이 퍼지고 있던 찰나였지만요. 모나코의 레이니에공과 눈이 맞고 그는 그녀의 악명을 알지 못했던 듯싶습니다.
막대한 지참금을 들고 모나코 왕비가 되다
사실 알았어도 모나코 왕에게 당장 필요했던 것은 경제적 위기를 모면하는 일이었습니다. 26살이 그레이스 켈리는 무려 200만 달러의 지참금 이외에 둘의 결혼으로 얻은 것이 더 많아 보였습니다. 그레이스 켈리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그레이스해졌고 모나코는 관광 수입이 늘고 프랑스와의 합병 위기를 넘기면서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나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레이니에공도 사생활면에서 그리 깨끗한 평을 받는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둘 사이가 삐걱거린 원인 중 하나가 레이니에 공이 그녀의 과거 행적을 알았기 때문이란 말도 있는데요. 남편과의 불화설과는 별도로 자신을 꼭 닮은 행동 패턴의 막내딸 스테파니 공주로 인해 속 꽤나 끓었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켈리의 죽음
그레이스 켈리는 52세에 운전을 하고 가다가 협곡으로 떨어져 세상을 하직하게 됩니다. 그녀는 당시 16살 연하의 젊은 남자와 깊은 관계를 유지한 사이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교통사고에 암살설이란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차에 함께 탔던 스테파니는 무사했다고 하는데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느껴지는 죽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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