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에 부역한 부모와 레지스탕스를 도왔던 발레리나 오드리 햅번 스토리
어마무시한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한 오드리 햅번은 소년 같은 느낌의 왈가닥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소녀가 성장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배우로 현대인들에게 여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세기의 배우입니다.
미소년처럼 중성적인 매력의 오드리 햅번
오드리 햅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 태생입니다. 영국 은행가 출신의 아버지와 네덜란드 남작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드리는 어릴 적부터 발레를 배우며 발레리나를 꿈꾸었습니다. 런던의 기숙학교에 다니던 중 전쟁이 발발하였고 나치 정권이 우세한 상황속에 그녀 엄마가 먼저 가입하고 남편을 권유합니다.
그러다 남편이 더 활발하게 나치 정권을 도왔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모녀는 남편을 두고 네덜란드로 도피하였고 오드리 햅번은 그곳에서 발레 수업을 계속 받습니다. 오드리 햅번의 아버지는 가산을 탕진해가면서까지 나치군에게 협조하였고 엄마는 파시스트 잡지에 히틀러에 대한 찬양글까지 썼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보호받지 못하였고 네덜란드에 가서도 거의 굶어 죽을 뻔합니다.
레지스탕스를 도운 오드리 햅번
오드리 햅번은 주변 지인들이 잡혀가고 그들의 잔혹성을 직접 본 후 레지스탕스의 편지를 전달해주면서 저항 운동을 도왔다고 합니다. 당시 어린 아이들은 수색을 당하지 않았기에 레지스탕스들이 아이들을 통해 돈과 서신 심부름을 시켰고 그에 적극 동참했는 모양입니다.
어느 정도 커서는 발레 공연으로 번 돈으로 도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전에 그녀 엄마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히틀러도 직접 만나고 나치 장교들과 교제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훗날 오드리 햅번이 유명해진 순간에도 이 사실을 숨기려 했던 것은 오드리 햅번의 선행과 동시에 부모가 나치에 부역한 것에 심한 컴플렉스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욕보이게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당시에 그 사람들도 뭐 알고 그런 것이겠나요.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고 당시 엘리트 층은 나치 정권에 동조한 사람이 많았으니까요.
아무튼, 아버지는 반역죄를 받지만 엄마와 딸은 혐의없음으로 무마되긴 했습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모든 죄를 뒤집어 쓴 것인 것 같기는 합니다.
배우가 된 오드리 햅번
오드리 햅번은 발레리나에서 뮤지컬 합창단으로 데뷔한 후 본격적인 배우 생활을 하게 됩니다. 데뷔 초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원래 눈썹이 짙은 편이었는데 당시 가는 눈썹이 유행하여 그녀도 따라 했다가 낭패를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짙고 두꺼운 눈썹으로 변신한 후 미모가 완전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1953년 로마의 휴일로 세계를 강타한 배우로 탄생합니다. 지금봐도 엄청 아름답고 매력적인데 당시에는 얼마나 더 대단하게 보였을지 상상조차 안 됩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발레로 다듬어진 우아한 자태 그리고 남다른 패션 감각은 지금봐도 너무 근사합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연극 무대에서도 토니상을 받는 등 1953년에 청순한 매력의 스타로 오드리 햅번을 능가할 배우는 없어 보였습니다.
1950년대뿐만 아니라 1960년대 결혼 후에도 그녀의 인기는 폭발적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신체 변화가 없던 오드리 햅번은 여러 번의 유산을 하고 임신을 했음에도 체형이 전혀 변하지 않아서 더욱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오드리 햅번의 남다른 사생활
오드리 햅번은 격동의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그러한 불우한 환경탓인지 한 남자에게 정착을 하지 못하고 편력이 엄청 심한 배우로 알려졌습니다. 당대 최고 잘나가는 스타들이 으레 그런 것도 있지만요.
오드리 햅번은 얌전하고 우아한 생김새와는 전혀 다르게 결혼에 불륜에 남의 가정 파탄에 이혼에 유산에 결혼 중에 불륜에 하여튼 사랑 난봉꾼이었습니다. 그렇게 배우로는 잘 나갔지만 사생활은 엉망이던 오드리 햅번은 그래도 사회적으로는 선행을 많이 하여 세기의 천사라는 호평을 듣습니다.
어린 시절 배가 고파 굶어 죽을뻔했던 기억을 떠오리며 못 사는 나라의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고 그녀의 이러한 행동이 많은 여배우 및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 그녀를 따라 실천한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사생활은 흉했지만 사회 생활 만큼은 누구보다 모범적이고 아름다웠던 오드리 햅번은 1992년 대장암 말기 선고를 받고 1993년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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