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장의 역사(삼국시대~해방직후)
한국 화장의 역사
삼국시대 고구려 시대 화장 특징
고구려시대는 5-6세기 경에 연지화장을 했다. 당시의 고분인 쌍영총 벽화에 남녀가 입술과 볼을 붉게 화장하고 있는 것이 근거다. 한편 수산리고분벽화의 귀부인상도 뺨과 입술이 연지로 단장했으며 눈썹 모양은 가늘고 약간 둥근 형태를 볼 수 있다.
백제인의 화장 특징
삼국사기에는 무녀와 악공이 연지화장을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인의 화장술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 기록은 거의 없으나 중국 문헌에 백제인의 화장이 시분무주(施粉無朱 분은 바르되 연지를 바르지 않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시대 화장 |
이는 중국 여인의 화장과 비교한 것으로 백제인은 엷고 은은한 화장을 좋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기록에는 서기 285년 백제로부터 화장품 제조 기술과 화장법을 배워갔다고 나온다.
신라시대 화장 특징
신라시대에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文姬)가 엷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보여준 시기라 생활수준도 높아 통일 이후 화장 경향이 화려해졌다고 추측한다.
고려시대 화장 스타일
고려인들은 향유(香油) 바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를 즐겨 바르지 않았고 버드나무 잎같이 가늘고 아름답게 눈썹을 그리며 또한 비단 향주머니를 차고 다녔다고 한다.
태조 왕건 때는 교방(敎坊)이 설치되어 기생 중심으로 화장이 보급되었다.
8대 현종 때는 기생들에게 특유의 화장법을 가르쳤는데 머리에 기름을 윤기나게 바르고 분을 두껍게 발랐으며 눈썹을 그리고 불연지를 붉게 칠했다. 여염집 여자들은 화장이 옅고 기생들은 화장이 화려했다.
서기 1274년 이후 원나라에서 공녀를 요구하여 80년간 과부 및 처녀를 선발하여 보냈기에 공녀로 뽑혀가기를 꺼려하느라 조혼 풍습이 생겨났다. 또한 짙은 화장은 기피하고 기혼 여성이나 기생들만 화장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화장 특징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강력한 유교 통치로 남녀 7세가 되면 나란히 있지도 못하고 남편과도 내외하며 화장도 경시되었으며 외출시 여성은 얼굴을 반드시 가리고 다니도록 규제했다.
미인박명,미인경시는 이때부터 나온 말이라 여성들은 혼인할 때 빼고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명문가의 지침서의 일종인 '규합총서'에는 두발 형태는 물론 열 가지의 눈썹 그리는 법, 입술, 연지 바르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화장을 경원시한 만큼 피부를 희게 가꾸기 위해 분세수를 하였는데 물에 갠 분을 얼굴에 바른 후 물로 씻어낸 일종의 팩이다. 얼굴을 하얗게 해주는 이러한 방법은 남성들도 즐겨했다.
숙종 때는 현대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원조격인 매분구가 있어 방물장수, 일종의 방판을 통해 여인들에게 화장과 화장품을 확산할 수 있었다.
개화기에서 해방직후 화장 특징
조선은 일본 및 서구 열강들의 문호개방 요구로 1876년 개국을 맞게 되었다. 개화기 화장품의 주종은 분백분으로 1916년 생긴 박가분(朴家粉)은 공업화된 화장품의 효시다. 그러나 이후후 납중독 사건으로 폐업(1937년)하기는 하였고 이후 비슷한 서가분, 장가분, 서울분, 설화분 등 유사 상표가 등장했다. 신식 화장법이 유행하면서 입술과 연지색이 짙어지고 향수와 비누의 향이 강해졌다.
이 시기에는 여성들이 신식교육과 문화를 받아들여 소위 신여성들은 쪽머리를 퍼머머리로 바꾸고 짧은 소매,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양산을 쓰고 다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스타일은 기생들에게 먼저 전파되었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은 거부감을 가졌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이 철수하면서 화장품 산업은 위축되었고 1950년 전쟁 이후 더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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