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탤런트 황진이에 관하여
황진이(1520?-1560?,개성)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 송악의 기생이다. 그녀의 정확한 생몰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520년대에 출생하여 1560년대 즈음에 죽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황진이 어머니는 진현금이란 아전의 딸로 태어났으나 딸보다 미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날 빨래터에서 지나가던 황진사의 아들과 만났고 정을 통하였지만 신분상 결혼은 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이 바로 황진이다.
황진이의 기생 스토리
황진이는 제멋대로 성장한 것인지 워낙 똑똑했던 것인지 외모도 출중하고 성격도 거침이 없었다고 한다. 15세가 되던 해에는 글을 읽다 지나가던 상여가 황진이 문 앞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황진이를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의 상여였던 거다. 이 소식을 들은 황진이가 자기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주며 곡을 했더니 그제서야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15살이면 아직 어린 핏덩이인데 옛사람들은 하여튼 조숙하다. 그리고 이 일화는 황진이 영화마다 등장하는 씬이기도 하다.
황진이는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첩의 딸로 태어나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답답하게 사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주변의 만류에도 기생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모두가 그녀를 보기 위해 그녀가 있는 송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담을 찾아간 황진이
당시 개성에는 유명한 학자와 선승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화담 서경덕 선생과 지족선사가 있었다. 황진이는 평소 두 사람을 존경하였는지 사랑하였는지 관심을 가졌고 그러다 이들의 인품을 시험하기 위해 먼저 화담 서경덕 선생을 찾아간다. 선생은 허락했고 황진이가 어떻게든 유혹하려 했지만 선생은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몇 년 동안이나. 그래서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화잠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역시 송도 3절 중 하나라고 하니 화담이 나머지 둘은 무엇이냐고 묻자 황진이가 하나는 박연폭포고 다른 하나는 자기라고 했다고.
화담 이후 지족선사를 시험하려고 지족암을 찾아간 황진이
처음에는 단호하게 대하던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요부짓에 굴복하고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중의 인생을 망친 황진이, 지족선사는 그만 파계하고 이후로 세상에 떠도는 말이 망석중 놀리듯 하다와 십년공부 아미타불은 다 이 일화를 바탕으로 생긴 거라고 함.
「청산리벽계수(靑山里碧溪水)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明月 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시조는 황진이가 지은 시조로 몇 백년이 된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흔히 부르는 것이다.
스승 서경덕 사후
서경덕이 죽고 난 후 황진이는 서경덕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고 한다.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묘향산을 막론하고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덧 나이도 서른이 훌쩍 넘었다.
황진이의 동거남 이사종
여행 후 돌아왔더니 이사종이 함께 살자며 졸랐고 황진이는 60세가 되는 6년간만 살자고 약속하였다. 6년이 지나고 이사종은 그녀를 붙잡았으나 황진이는 살림을 정리하고 송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십이 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나는 평생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놀기를 좋아하였은 즉 고적한 산중에다 묻어주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다 묻어주며, 또 평생에 음률을 좋아하였은 즉 장사지낼 때에도 곡을 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장례를 지내달라』하였다.
그의 무덤은 몇 백년 전까지도 송도 대로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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